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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라이트 계열의 어느 교수가 조선 세종대왕이 만든 기생 제도를 두고 20세기 일본군 위안부의 뿌리라고 해서 파문을 일으켰죠.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의 뿌리는 기생이 아니라, 19세기 일본의 가라유키상(からゆきさん)이었습니다.
가라유키상은 취업 브로커에게 속아서 해외로 팔려나가 매춘부로 살았던 일본인 여자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기간은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였으며 그 인원은 최소 30만에서 최대 5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 가라유키상이 해외에 나가서 매춘을 하며 벌어들인 돈은 놀랍게도 일본 정부가 관리했는데, 1910년 일본 정부 전체의 수익 중 무려 10%가 가라유키상의 매춘으로 번 돈이었다고 합니다.
아울러 가라유키상은 일본군이 직접 관리하는 공창에서 일했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의 원조가 되었죠.
아래는 가라유키상에 관한 자료들을 모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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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5/29/0200000000AKR20170529135000797.HTML
외국으로 나가 성을 파는 여성을 일본에서는 가라유키상이라고 부른다.
가라유키상은 14세기 포르투갈 등 유럽 선박이 드나든 나가사키와 구마모토 항구에서 처음 생겼으나 16세기 말부터 크게 위축된다.
(위의 본문에 약간 오류가 있는데, 일본에 포르투갈 선박이 드나들었던 때는 14세기가 아니라 16세기 초부터였습니다.)
천하 통일로 전국시대를 마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여성이 인도 등지로 팔려나가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가라유키상은 메이지 정부 천황이 집권한 1868년 이후 부쩍 늘어난다.
이들은 중국, 홍콩, 대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파푸아뉴기니 등 아시아는 물론, 러시아 시베리아, 하와이, 아프리카 탄자니아 등으로도 나갔다.
대부분 빈민 출신인 가라유키상은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모집했다.
먼저 제겐이라는 인신매매 브로커가 나선다.
제겐은 농촌이나 어촌 등을 돌며 가정 형편이 어려운 소녀들에게 일자리 알선을 미끼로 외국행을 제안한다.
이들이 동의하면 급여 선지급 등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부모에게 제공한다. 부모는 딸을 브로커 등의 처분대로 맡기겠다고 약속하는 증서에 서명한다.
주로 14~16세인 여성들은 이렇게 해서 선박에 몸을 싣는다.
외국에 도착하는 순간 감언이설에 속은 사실을 깨닫지만,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부모가 받은 선금은 물론, 브로커 수수료, 교통비 등을 전부 빚으로 떠안은 상태라 성매매를 거부할 수 없다. 돈 올가미에 걸려 성노예가 되는 것이다.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례도 적잖다.
가라유키상 모집과 집단송출은 명백한 불법행위인데도 일본 경찰은 묵인했다.
서양 열강을 따라잡는 데 필요한 외화를 벌어주는 애국자라는 인식에서다.
일본은 제국주의 확장 정책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군인으로 비유해 가라유키상을 낭자군으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1920년 성매매 금지 이전까지 가라유키상은 약 50만 명이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가라유키상은 일본군이 직접 관리하는 공창에 들어가거나 민간 집창촌 등에서 일했다.
공창에서는 일본 헌병이 매독 등 성병을 검사했다.
가라유키상 역사는 장기간 은폐됐다가 1972년 '산다칸 하치만 사창가'라는 책이 발간되면서 일반인에 알려지게 된다.
가라유키상 실태를 담은 이 책에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칼리만탄) 집창촌 사례가 자세히 소개됐다.
주로 서양인이 이용한 이곳에서는 가라유키상과 포주가 몸값을 절반씩 나눠 가진다.
승객을 가득 태운 배가 항구에 들어올 때는 일 인당 하룻밤 손님이 30명을 넘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뜸했다.
한 달 동안 손님을 20명 이상 받지 못하면 채무 상환과 생필품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다.
싱가포르에서는 일부 여성이 첩자로 활동하며 점령군이던 영국군 정보를 빼내 본국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런 정보는 일본군이 1941년 12월부터 두 달간 말레이반도를 놓고 영국군과 벌인 싱가포르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귀국 후 끔찍한 차별과 천대를 받는다.
돈에 눈이 멀어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에서다.
1905년부터 중국 상하이와 싱가포르, 인도 뭄바이 등에서 일한 시마키 요시라는 여성은 귀국 후 주변 냉대 탓에 목숨을 끊었다.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서 여생을 마친 여성도 적잖다.
싱가포르와 홍콩, 말레이시아, 시베리아 등에는 가라유키상이 죽어 묻힌 묘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에 속임수에 넘어가 몸을 팔다가 가족을 만나지도 못하고 외국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의 무덤이다.
이런 묘지에 안장된 여인은 그나마 낫다.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이나 성병, 폐병 등에 걸려 죽은 뒤 바다나 정글에 버려진 여인이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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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donmany0203/30170986586
このように??時代も明治大正時代も大勢の日本女性が?春婦として?り飛ばされたのですが、現代の日本人としては認めたくない事?なのだろう(「明治から大正にかけて、30万人もの日本の若い女性が海外に?られていった」)
이와 같이 전국시대도 메이지 타이쇼 시대도 많은 일본 여성이 매춘부로서 팔아 치워졌습니다만, 현대의 일본인으로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일 것이다. (「메이지부터 타이쇼에 들이고, 30만명의 일본의 젊은 여성이 해외에 팔리고 갔다」)
現代人が明治大正の貧しい時代のことを知らないのは、明治以降の日本の?史を詳しく?えないからであり、テレビや映?などで描かれる明治大正の貧しい農家の?子を知る事は難しい。小林多喜二の「蟹工船」などの小?やプロレタリア文?などの作品などを?めば?時の貧しい農家の?子は分かるのですが、女は女?として?られ、男は人夫として?られた。
현대인이 메이지 타이쇼의 궁핍한 시대의 일을 모르는 것은, 메이지 이후의 일본의 역사를 자세하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며, 텔레비전이나 영화등에서 그려지는 메이지 타이쇼의 궁핍한 농가의 모습을 아는 일은 어렵다. 고바야시 다키지의「가니코센」등의 소설이나 프롤레타리아 문학등의 작품등을 읽으면 당시의 궁핍한 농가의 모습은 압니다만, 여자는 녀낭으로서 팔려 남자는 인부로서 팔렸다.
からゆきさんと呼ばれた海外に?り飛ばされた日本の若い女性は20万にとも30万人とも言われますが、多くが20?足らずで病?などで亡くなった。親たちはどのような事情で子供を?り飛ばしたのか分かりませんが、?時の貧しさを知らなければ親を責める?にもいかないでしょう。しかしこれほどの大勢の女性が海外に?られたのに多くの人がこの事を知らない。
(으)로부터 유키씨로 불린 해외에 팔아 치워진 일본의 젊은 여성은 20만에와도 30만명이라고도 말합니다만, 대부분이 20세 미만으로 병등에서 죽었다. 부모들은 어떠한 사정으로 아이를 팔아 치웠는지 모릅니다만, 당시의 궁핍함을 모르면 부모를 탓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많은 여성이 해외에 팔렸는데 많은 사람이 이 일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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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joyjap.egloos.com/1924854
러일 청일 전쟁을 위해 30만명의 여성을 매춘부로 수출
露日戦争と 日清戦争 ために 30万名の女性を売春婦で輸出
「からゆきさん」は江戸時代末期から明治時代、大正時代をへて昭和の初めごろまで存在していた。親兄弟のために苦海に身を沈める(街娼婦=売春婦として生きる)のは親孝行と世間では見られていたし、時の政府も自分の娘の売買を容認していた。「からゆきさん」とは「唐行きさん」、つまり、外国を意味する唐(中国)天竺(インド)に行く、外国に働きに行く女性という意味だった。
「가라유키씨」은 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타이쇼 시대를 거쳐 쇼와의 처음경까지 존재하고 있었다.친형제를 위해서 고해에 몸을 가라앉히는(가창부=매춘부로서 산다) 것은 효도와 세상에서는 볼 수 있어 해, 당시의 정부도 자신의 딸(아가씨)의 매매를 용인하고 있었다.「가라유키씨」란「당나라로 간 여자들」, 즉, 외국을 의미하는 당(중국) 텐지쿠(인도)에 가는, 외국에 일하러 가는 여성이라고 하는 의미였다.
富国強兵策を推進するためにはイギリスやフランスといった欧州列強から軍艦や大砲などを購入する必要があった。際立った輸出品目のない当時の日本だったが、富国強兵のためには外貨が必要だった。「からゆきさん」たちが身体を売り、送金してくる金銭は明治政府には貴重な外貨だった。日清日露の両戦争に勝った陰の功労者は「からゆきさん」だった。ところが、日本政府は「からゆきさん」を島原地方や天草地方出身者が多かったため、島原族、天草女、娘子軍とよんでいた。しかし、日清日露戦争に勝ち国際的に日本の評価が上がり、一等国を自認するようになって、政府外務省は醜業婦、賤業婦、密航婦などと呼んで「一等国の日本の恥」として蔑んだ。
부국 강병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영국이나 프랑스라고 하는 유럽 열강으로부터 군함이나 대포등을 구입할 필요가 있었다.두드러진 수출품눈이 없는 당시의 일본이었지만, 부국 강병을 위해서는 외화가 필요했다.「가라유키씨」들이 신체를 팔아, 송금해 오는 금전은 메이지 정부에는 귀중한 외화였다.일청일러의 양전쟁에 이긴 그늘의 공로자는「가라유키씨」였다.그런데 , 일본 정부는「가라유키씨」을 시마바라 지방이나 아마쿠사 지방 출신자가 많았기 때문에, 시마바라족, 아마쿠사녀, 여군 부대라고 읽고 있었다.그러나, 일청러일 전쟁에 이겨 국제적으로 일본의 평가가 올라, 일등국을 자인하게 되고, 정부 외무성은 매춘부, 천업부, 밀항부등이라고 불러「일등국의 일본의 수치」로서 업신여겼다.
일본의 근대화는 이처럼 자기나라 국민들을 악랄하게 착취하여 얻어진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가라유키상으로 자기 나라 여자들을 성노예로 착취한 경험을 가진 일본은 곧바로 조선인, 중국인, 동남아인 등 이민족 여자들을 상대로 한 성노예인 위안부를 조직하게 되었던 것이죠.
출처 | http://blog.daum.net/timur122556/14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