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안 문댄서 -1-
캔틀롯 중앙 도서관은 항상 많은 포니들로 넘쳐났지만 조심스런 행동으로 고요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간간히 책을 넘기는 소리나 책을 꽂는 소리가 조용히 들릴 뿐 모든 포니들은 소리를 주의하여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캔틀롯 포니들의 특성 때문인지 이들은 자신의 영역을 중요시 했다. 상대의 영역에 함부로 침범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게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자신이 이곳에 있는 유일한 포니인듯 행동한다. 도서관 포니들의 유형은 각양각색이었다. 대부분의 포니들은 순수하게 책을 읽으러 온 부류이고 자료를 찾거나 공부를 하거나 책을 빌리러 오는 포니들도 있었다. 그 중 도서관이 제 집인냥 개관부터 폐관때까지 죽치고 눌러앉는 부류도 있다. 자리는 넘쳐났기에 굳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다른 포니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야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문댄서도 그 중 하나였다. 문댄서의 하루는 정말 단순했다. 학기가 방학을 맞이한 요즘같은 때에는 그녀는 집에서 잠을 자고 그 외 모든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낸다. 그녀는 아침을 먹고 도서관에 도착한 뒤 그 날 공부할 책들을 그녀 자리 양 옆에 높게 쌓아둔다. 볼 책이 워낙 많아 곧바로 꺼내 볼 수 있게 하기 위한것도 있지만 양 옆 자리를 차지해 누구도 자기 옆에 앉지 말라는 무언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 뒤 그녀는 동상처럼 앉아 한참동안이나 책과 동화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30분정도 나가서 대충 허기를 떼우고 다시 와서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공부를 이어나간다. 폐관 시간이 되면 항상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다 사서가 퇴근할 때가 되서야 어두운 독서실을 나선다. 그녀에겐 그것이 삶의 전부였다. 책속에 세상이 있고 책 밖의 세상은 그녀가 잠시 들르는 공간일 뿐이었다. 그녀에겐 집과 도서관에 들르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책상 위에서 잠을 자고 이 책상 위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방학을 1분 1초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고 가능한 모든 지식들을 쑤셔넣고 싶었다. 자기 눈 앞에 있는 책을 해치우고 도서관 전역에 있는 모든 책을 읽고 싶었다. 한시라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조바심이 났다. 그녀에겐 공부만이 자기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다짐을 알아주는 포니는 주위에 없었다. 그녀도 도서관 안의 많은 포니들 중 하나 일 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시크릿 크러시는 캔틀롯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은 데스크에서 포니들에게 책을 대출해주고 반납받은 책을 제자리에 꽂는 역할을 맡고 있다. 언뜻보면 간단해 보이는 이 일은 사실 왠만한 경험이 없다면 해내지 못하는 일이다. 일단 도서관의 유동마가 상당한 편이고 오가는 책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바쁠 때는 10분정도 앉아 반납받은 책을 수레에 쌓다보면 어느샌가 한가득 쌓여간다. 이 많은 책들을 제자리에 찾는 일도 만만치 않다. 구역별로 사서가 나뉘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사서 하나가 맡은 구역도 왠만한 도서관 하나 정도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네, 반납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크릿은 포니가 반납할 책을 수레에 차곡차곡 쌓으며 미소를 잃지 않고 인사했다. 그는 한 포니도 빠짐없이 도서관 손님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지만 그 중 인사를 받아주는 포니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되려 왜 자기한테 인사를 하냐는듯 무시가 섞인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인사를 거두지 않았다. 꽉 막힌 이 공간에서 인사조차 건내지 않으면 숨통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이 공간에서 인사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미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시크릿은 흘끗 수레를 쳐다봤다. 다른 사서들은 수레에 쌓여가는 책들을 보며 한숨을 쉬지만 시크릿은 오히려 미소가 지어졌다. 수레가 빨리 채워졌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슬슬 책을 정리해야 겠다 생각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레를 끌고 나갔다. 수레에는 백여권이 넘는 책이 쌓여 무게감이 있었지만 노련한 그에겐 이 정도는 가뿐했다. 반납받은 책은 책장별로 모아두긴 했지만 하나씩 찾아가는데 시간 소모가 컸다. 그는 머릿속으로 어느 경로가 가장 적합할지 계산했다. 책들을 살펴보며 책장의 어느 위치에 꽂아야 하는지 그려보았다. 어느 정도 사서로 일한 경험이 쌓이다 보니 이런 기술은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었다. 최대한 빨리 책들을 정리하고 자리로 돌아오는게 좋았다. 한가할 때는 자리를 오래 비워도 상관없지만 바쁠 때는 몇 분 안되서 책을 대출할 포니들로 줄이 길게 생기기도 한다. 문제는 언제 갑자기 바쁘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 최단시간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는 도서관 내부를 산책하듯 멈추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책장과 책장 사이를 오갔다. 책이 들어갈 자리를 발견하면 걷는 도중 마법으로 책을 꽂았다. 책장에 꽂을 책이 많더라도 여러권의 책을 동시에 움직여 각자의 자리에 정확히 꽂아 넣었다. 누군가가 본다면 사서는 수레를 끌고 걷고 있을 뿐인데 책들이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처럼 보였다.
시크릿은 어쩌면 자신의 특별한 재능이 사서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누구보다 정확하고 신속하게 책을 정리하는 능력도 그렇고 자신의 큐티마크가 책인 것도 그러했다. 큐티마크를 보고 분명 마법 분야에서 훌륭한 교수가 될거라고 그의 부모는 기대했지만 시크릿은 분명 부모님이 잘못 해석한 것일거라고 확신했다.
시크릿은 빈 수레를 끌며 다시 데스크 쪽을 걸어갔다. 그는 책을 정리하면서 멈추지 않고 걸었지만 데스크로 오기 전 한 번 멈추는 곳이 있다. 바로 문댄서가 앉아있는 책상 옆이었다.
시크릿은 그녀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가만히 그녀를 지켜봤다. 문댄서는 자신이 읽고있는 책에 정신이 팔려 시크릿은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지 머리를 쥐어싸매며 공책에 수식을 미친듯이 써내리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지금 그녀에겐 눈 앞의 수학 문제 외엔 중요한 것이 없어보였다.
그는 매번 책을 정리하면서 돌아올 때 문댄서 근처에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곤 항상 똑같은 갈등을 한다. 오늘은 그녀에게 말을 걸어봐야 할까. 말을 거다면 무슨 말을 해야할까. 말을 건냈는데 무시 당하면 어떻게 할까. 시크릿은 하루에도 몇번이나 이곳에 멈춰 똑같은 갈등을 하지만 결국 한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혹시라도 문댄서가 자신을 먼저 알아채주고 말을 걸어주지는 않을까 상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 절대로 없을 것이다. 문댄서는 한번도 그를 알아차린적이 없었다. 아마 문댄서 앞에서 춤을 춰도 눈길 한번조차 주지 않을것이다.
그는 결국 항상 빈 수레로 데스크로 돌아온다. 책을 정리할 때면 마음속에 가득 찬 용기가 돌아올 때는 수레처럼 허전하게 비워져서 돌아온다. 어쩌면 다음 번 정리할 때는 용기가 나지 않을까. 어쩌면 다음 번엔 문댄서가 먼저 알아채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만을 주입시키며 수레를 다시 채워나간다.
"네, 대출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크릿은 아까 전보다 조금 힘이 없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말 걸어 봤어?"
실크가 사이다를 홀짝이며 말했다.
시크릿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기 눈앞에 있는 사이다가 담긴 잔을 내려다 보았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반 이상 남아있는 사이다를 모두 비우고는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의 친구 실크 딕은 그 행동으로 대답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오늘도 역시네."
실크가 말하고는 이어서 사이다 잔을 비웠다. 앞치마를 입고 서빙을 하던 포니가 테이블 앞으로 오더니 주문을 받자 실크는 사이다 두 잔을 더 주문했다. 사과 모양 머리핀을 한 종업원 포니는 잔을 들고 사라졌다.
"난 진짜 개찐따인가봐... 어떻게 말 한 마디를 못거는걸까."
시크릿이 살짝 혀가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그는 술기운만 받으면 자기비하가 늘어나는 버릇이 있다.
"뭐, 걔 하나 보려고 도서관에서 2년동안 일하면서 말도 제대로 못거는 거면 찐따 맞긴 하지."
실크가 솔직하게 말했다. 시크릿은 그저 헛웃음만 지었다.
"그래. 나도 알아. 하하."
시크릿이 도서관 사서로 일하게 된 지 2년이 지났다. 그 말은 그가 도서관에서 문댄서를 지켜보고 있는 것도 2년이 지났다는 의미다. 시크릿이 평소에 잘 가본 적도 없는 도서관에 일하게 된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문댄서는 항상 한 자리에서 공부를 하기에 그녀가 다니는 구역에서 사서로 일하게 된다면 언젠가는 서로 친해질 계기가 생기지 않을까 하던 기대감 때문이었다. 만약 문댄서가 다니는 구역에서 사서를 구하지 않았다면 사서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런 계기는 2년째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시크릿은 포기하지 않고 한결같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문댄서의 무관심도 한결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2년동안 대화는 커녕 자신의 이름조차 알리지 못하게 된 마당에 이 모든것이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근데 대체 어쩌다가 그런 애를 좋아하게 된거냐."
종업원이 사이다 두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시크릿은 잔을 가로채 벌컥 벌컥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그런 애라니, 우리 무니가 어때서!"
시크릿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 이 미친 스토커 새끼가 벌써 지 애인인줄 아네."
실크는 얼굴을 찡그리며 얼굴에 튄 침을 닦았다.
"그래 그럼. 언제부터 좋아했던거야?"
실크는 사이다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시크릿은 생각에 잠겼다. 언제인지 기억해 내려고 기억을 더듬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짝사랑이자 첫사랑 얘기를 이 떠벌이에게 해도 될까 고민을 하고 있는 눈치였다. 평소라면 절대 밖으로 꺼내지 않는 화제였지만 오늘은 기분이 달랐다. 술기운을 받아 판단력도 흐려졌고 답답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고 싶었다. 그는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12년 전 처음 봤을 때."
"푸훕!"
실크의 사이다가 코로 역류했다. 시크릿은 실크의 반응을 보며 괜히 말했다 후회했다.
"진심이야?"
실크가 믿지 못한다며 물었다.
"맞아."
시크릿이 대답했다.
"하."
실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과학 실험실에 있었을 때 부터 좋아했어."
과학 실험실은 시크릿이 다닌 초등학교의 이름이다. 캔틀롯에서 영재 교육의 중심에 서 있을 정도로 이름 있는 학교 중 하나이다. 이 학교를 다니는 대부분의 유니콘들은 셀레스티아의 수석 유니콘 학교를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공부를 한다. 물론 모두가 셀레스티아의 학교에 진학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퀘스트리아중에서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한 곳이다.
"잠깐. 문댄서가 과학 실험실 출신이었어?"
실크가 놀란듯 물었다. 실크 역시도 그 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모르고 있던거야? 내가 말하지 않았어?"
"아니, 말 안했어. 우리 학년에 그런 애가 있었다고?"
"기억 못할 수도 있지. 그렇게 눈에 띄는 애도 아니었으니까."
실크는 기억을 더듬었다. 보통 유니콘 반은 10마리 정도가 한 반 이었다. 그가 기억나는 포니라곤 지금 눈 앞에 있는 자신의 친구와 비커를 자기 머리에 끼우곤 미친듯이 뛰어다니는 포니 정도 뿐이었다. 나머지 동창들도 어렴풋이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의 기억에는 문댄서는 없었다.
"뭐, 잘 생각해보니 반 중에 책만 하루종일 읽던 애들이 있던것 같기도 한데. 똑같이 생긴 애들 둘이서 놀지도 않고 이상한 실험이나 하고 있었던것 같기도 하고.. 근데 문댄서가 나랑 같은 초등학교도 나왔을 줄은 몰랐네."
시크릿은 잠시 새어나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쨌든 옛날에 학교에서 실험 발표를 한 적이 있는데 우연히 그 애와 한 조가 되었어. 우리는 서로 모여서 발표 준비를 했지. 평소 얘기해보진 않아 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준비를 했어. 발표 날이 되고 내가 발표를 맡게 되었는데 막상 순서가 다가오니 엄청 떨리는거야. 우리가 며칠 동안 준비해온 것들이 나 하나때문에 망하게 되면 어쩌지 생각하니 눈물까지 나오더라. 발표 순서가 되고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어. 그 때 그 애가 나한테 오면서 긴장하지 말라고 발굽을 잡아주며 웃어주더라."
"그래서 그 위로가 너한테 큰 힘이 되었고 그 때 부터 그 애를 좋아하게 됐다 뭐 그런 얘기?"
실크가 대신 이야기를 마무리 해주었다. 너무나 뻔한 얘기에 하품까지 나올 뻔 했다.
"맞아."
시크릿이 말했다.
"근데 진짜야, 그 얘기? 내가 아는 문댄서랑은 완전 딴판인데?"
실크는 믿기지 못한다는 듯 말했다. 실크가 대학에서 보는 문댄서의 이미지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학교에서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수업 때 마다 혼자 맨 앞자리에서 수업을 듣고, 교수들에게 곤란한 질문들 던져대며 학생들의 원성을 사는 존재이다. 조별과제는 단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고 오직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치운다. 성적은 늘 압도적인 1위지만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는 그녀를 같은 학생으로 인정하는 포니는 없었다. 실크 딕 역시 한번도 문댄서와 말을 걸어본 적도 없고 그저 다른 학생들럼 유령 취급을 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감정이 메말라졌지만 속은 아직 순수하고 따듯한 아이일거야."
시크릿이 말했다.
"콩깍지 제대로 씌었구만."
실크는 다시 사이다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때부터 12년동안 몰래 뒤에서 짝사랑 했다고?"
"아니, 12년 동안 그런건 아니고. 그 때부터 좋아지긴 했는데 학창시절엔 말 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 그래서 그 애가 목표로 한 대학에 가서 그 때 고백을 하자 였는데...... 알다시피 난 재능이 없어서 대학도 못가고 더 이상 만날 일이 없다고 포기했었거든."
실크는 잠자코 들었다.
"그러다 2년전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다시 본거야. 알고보니까 그 애는 항상 같은 자리에서 매일 도서관에 나와 공부를 하더라고. 그리고......"
"그 때부로 사서가 되서 그 애를 지켜보며 고백할 기회를 노리고있다?"
이번에도 실크가 마지막 말을 가로챘다.
"응 맞아. 근데 너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아이고, 시크릿 크러시. 우리 순진하고 멍청한 친구야."
실크가 발굽을 이마에 기대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눈 앞에 자신의 친구를 어디부터 손봐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다.
"말을 걸어보자 다짐은 하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어. 그 애가 나랑 같은 학교였다는걸 아는지도 모르는거 같고. 내 자신이 너무 답답해서 화도 나고... 너한테 조언을 좀 구해보려고."
시크릿이 실크의 온갖 조롱을 감수하고 이 얘기를 꺼낸 목적은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실크 딕도 말 한마디로 암컷을 꼬시는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보다는 잘 알겠지 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2년동안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시점에서 취하는 극단의 조치였다. 무엇보다 문댄서와 같은 대학이니 자신보다 문댄서에 대한 정보도 더 알고있을것이다.
"내 조언이라... 정말 듣고싶어?"
실크가 물었다.
"응!"
시크릿은 곧바로 대답했다.
실크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친구의 기대하는 눈빛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정말 이걸 말해줘야하나 하고 계산하는 얼굴이다.
"알았어, 말해줄게."
시크릿은 활짝 웃었다. 그는 술기운을 몰아내고 그가 하려는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내 현실적인 조언은 '포기해'야."
시크릿은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게 조언이야?"
"아냐 잘 들어봐. 지금 네 찐따같은 행동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문댄서라고."
"문댄서가 왜?"
시크릿은 커진 눈으로 물었다.
"그 애는 지금 연애는 고사하고 포니랑 관계를 맺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있거든. 걔가 입학할 때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 인사를 하면 받아주기도 하고 말이 없기는 하지만 쌀쌀맞게 굴진 않았어. 그냥 낯가림이 심하다라고 생각할 정도였지. 근데 한 2년 전 부터인가 얘가 갑자기 변하더니 웃지도 않고 대화도 안하고 아무하고도 어울리려 하지 않는거야. 결국 인사도 안받아주니 우리도 인사를 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유령취급 하게 된거지. 그래도 신입생 땐 공부도 잘하고 예쁘다고 인기도 많았는데... 지금은 동굴에서 몇년 살고 나온 포니같아."
시크릿이 문댄서를 도서관에서 보기 시작한 것도 2년전이었다. 그 때 문댄서를 봤을 땐 확실히 겉모습이나 분위기가 자기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는 다르긴 했다.
"2년 전? 2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실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낸들 아니. 말도 안하는데. 아무튼 내가 생각하기엔 넌 절대 가망없으니 포기하란거야."
시크릿은 괜히 조언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희망적인 얘기를 들을거란 생각은 안했지만 이렇게 절망적인 얘기가 나올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오히려 그렇다면 문댄서에게 더욱 필요한건 그 애의 마음을 열어주는 포니잖아. 어쩌면 내가..."
"그래서 이제까지 문댄서에게 말을 걸어본 적은 있고?"
시크릿은 움찔했다. 실크의 날카로운 일침에 말문이 막혔다. 자신있게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2년간의 기다림을 이 술자리에서 갑자기 끝내라는건 너무 억울했다.
"......"
"뭐, 2년동안 단 한마디도 안했다면 더더욱 가망이 없는거지."
"사실 있어."
시크릿이 말했다. 실크가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정말?"
"응. 두번."
이 얘기는 가급적이면 하고싶지 않았다. 시크릿에겐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근데 다 무시당했어."
시크릿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 당시에는 일주일 동안 그 기억때문에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후유증이 컸다.
"뭐 그거야 당연하겠지. 그래도 2년 동안 완전 진전이 없던건 아니네. 무슨 말 했는데?"
"그냥.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냐고 물었는데... 단칼에 없다고 말하더라. 심지어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시크릿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풋."
실크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 미안."
실크는 사과를 했지만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시크릿이 실크를 째려보자 그제서야 웃음을 멈췄다.
"이 우둔한 포니야, 그렇게 연애를 몰라서 어떻게 살려고."
"그렇게 잘 알면 나도 좀 알려달라고."
시크릿이 애원하며 말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 절대 가망이 없는 것 같지만 일단은 넌 좀 제대로 알 필요가 있겠다."
시크릿은 다시 눈을 뜨며 귀를 쫑긋 세웠다. 실크는 씨익 웃으며 식탁에 발굽으로 턱을 괴었다.
"암컷이란 건 말이야, 시크릿 크러쉬."
그는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겉으로는 순수해 보일지 몰라도 속으론 아주 치밀하게 생각을 하는 생물이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이상한 수수께끼같은 말에 시크릿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 녀석한테 상담을 받아도 될까 신뢰도가 떨어진 표정이다.
"문댄서는 네가 그때 말을 걸었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것 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속으론 다 계산하고 있는 중이었어. 그렇기 때문에 넌 이미 말을 걸었을 때 상황이 끝난거야."
"말을 걸 때 이미 상황이 끝나다니? 답답하게 말하지 말고 좀 쉽게 알려줘."
"그 포니는 이미 네 말투, 목소리, 대사 만으로도 네가 접근하고 말을 건 목적을 파악하고 자기에게 수작을 부릴려는지 아는지 바로 알아채. 그 포니는 이미 네가 접근한 목적은 궁금하지 않아해. 그 포니가 궁금한 건 네 견적이야."
"견적?"
시크릿은 어느 새 실크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래. 네 외모, 목소리, 태도 등에서 나타나는 첫 인상을 평가하고 있는거야. 그 포니에게 흥미를 가지게 할 만한 견적이 나오지 않는다면 곧바로 거절하는거지."
"하지만 문댄서는 내 얼굴도 안보고 거절했는걸."
시크릿은 아직도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책 읽는데 방해가 된다는듯 귀찮은 파리라도 쫒아내는 듯한 목소리로 단칼에 거절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의 심장을 후벼 팠었다.
"그야 그 때 분명 네가 찐따같이 땅바닥이나 쳐다보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 저, 저기 우리 어디서, 그.... 보, 본적 있지 않나요?" 이렇게 말해서 그렇겠지. 그렇게 븅신같은 모습을 보이면 이미 끝장난거야."
실크의 흉내내기에 시크릿이 발끈하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그 때 자신의 태도를 보면 차라리 말을 안거는게 낫었다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말하니 당연히 상대도 그에 맞는 견적을 낸거지. 게다가 상대는 문댄서인걸. 왠만한 것들론 그 애의 흥미를 끌 순 없지. 자기가 책 읽는 시간을 희생할 만큼 가치있는 일이 아니고선 절대로 상대조차 안할거야."
실크의 조언이 계속될수록 시크릿은 자신의 가능성이 계속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문댄서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지만 자신감이 사이다 거품처럼 점점 사라져갔다.
"그럼 어쩌지...? 진짜 포기하는게 답이야? 방법이 없는거야?"
시크릿은 울먹이며 말했다. 착잡한 마음에 타는 목을 축이려 남은 사이다를 들이부었다. 실크도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는 사이다를 마시기 시작했다. 실크의 빈 잔을 보고 종업원이 리필을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집중해서 들어야했다.
"그럴 땐 강하게 말해야 하는거야."
실크가 사이다 잔을 식탁위에 쾅 내려놓았다. 시크릿은 돌발 행동에 깜짝놀랐다.
"딱! 벽으로 몰고가서 앞 발굽으로 벽을 쾅 치고 당당하게 말하는거야. "야, 너 내 포니해라!" 그럼 상대는 당황하겠지. 하지만 그건 당황해 하는게 아니야. 속으로 이미 높은 점수를 매기고 있는거야. '어? 이 포니 제법?'하고 말야."
"그게... 정말 통할까?"
시크릿이 불신의 눈초리를 보냈다. 처음 보는 포니에게 그런 짓을 했다가는 로얄 가드들한테 끌려가기 딱 좋아 보였다.
"통하고 말고."
실크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물론 그도 이 방법을 실제로 사용해 본 건 아니었다.
시크릿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성격에 그런 대담한 짓을 하기엔 용기가 도저히 나질 않았다. 말 한번 거는 것도 하루에 몇번이나 갈등하다 결국 포기하는 마당에 문댄서를 제대로 쳐다볼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걱정하는 것은 뒷일이었다. 거절당했을 경우 최악의 상황들이 머릿속에 훤히 비쳐줬다. 차라리 말하지 말 걸 후회하는 자신 모습이 그려졌다. 그나마 지금은 문댄서에게 용기가 있다면 언제든지 말을 걸 수 있다는 희망이 남아있지만 문댄서에게 말을 건 댓가로 얻게되는 결말엔 파멸밖에 남아있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시크릿은 겁에질려 떨기 시작했다.
"먼저 말을 걸 필요는 없잖아. 혹시라도 문댄서가 먼저 말 걸어주지 않을까? 혹시라도 옛날의 나를 기억하고 그 때의 추억이 생각나 나한테 호감이 남아있어서 먼저 말을 걸 수도 있어!"
시크릿은 떨리는 미소로 말했다.
"꿈 깨, 병신아."
실크가 무표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크릿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그런 일은 자기 꿈안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는걸 시크릿도 알고 있었다.
"무조건 니가 먼저 말을 걸어야해."
"무조건?"
시크릿이 힘없이 물었다.
"무조건."
실크가 단호하게 말했다.
"말을 못걸면 평생 멀리서 문댄서나 보면서 도서관 지박령으로 살아야 할거야."
실크가 말했다.
시크릿은 대답없이 바닥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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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도 OC이고 딱히 메인캐릭터 라 해봤자 문댄서 몇번 나와서 쓸까 말까 하다가 요즘 쓸 것도 없어서 써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