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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배, 바다에는 메아리가 없다
푸른 휘파람으로 호명하는 바람의 장송곡에
블루피터 만장(輓章)처럼 나부낀다
녹슨 갑판 아래 죽음을 밟고 살아도
파도에 유서를 쓰지 마라
출렁거리는 문장
해독할 수 없다
바다는 하늘에 닿아 있고
바닷길 따라 하늘로 돌아간다
부풀어 오른 수평선에 뱃머리 마디마디
피멍울 맺혀도
그리운 이름 부르지 마라
소리조차 침몰하고 사랑마저 삼켜 버리는
바다는 대답이 없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넓어지고
넓어져 비로소 깊어진 마리아나 해구(海溝)
비 내려도 싱싱하게 젖지 않고
눈 내려도 따뜻하게 쌓이지 않는
북태평양 겨울바다
날마다 부르는 이름과
항해일지에 미리 쓰는 유서들만 쌓여
그저 가슴 아래 묻어둘 뿐
바다에는
메아리가 없다
김주대, 화엄경
새싹은 하나의 이념
가장 깊이 이르러서
가장 얕은 곳으로 올 줄 아는 이의 약속이다
우주 이래, 지구 이후
흘러온 기억이 개화할 때
쪼그려 앉아 귀를 세우고
아주 멀리서 왔으므로 무척 작아진 소리를 듣는다
우주에서 음표 하나가 빠져나와서
이토록 작고 푸르다
불가사의는 하찮게 실현되고 이념은 클수록 소박하다
햇볕 속에 단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고
음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김명인, 어두워지다
다짐하는 일도 흐려버리는 일도 누구에겐가
지독한 빛이어서 극광까지
밀려가버렸다고 깨닫는 지금
구름다리도 걷혀버린 강 이쪽에서
건너편 저무는 버드나무 숲 바라본다
얽혀 자욱하던 눈발도
그 속으로 불려 나가던 길들도 그쳤는데
어스름 저녁 답은 무슨 일로 한참을 서성거리며
망명지에 선 듯 서쪽 하늘 지켜보게 하는가
사랑이여, 다 잃고 난 뒤에야
무릎 꺾어 꿇어앉히는 마음의 이 청승
쟁쟁한 바람이 쇳된 억새머리 갈아엎으면
내가 쏜 화살에 맞아
절룩이며 산등성이를 넘어간 그 짐승
밤새도록 흘렸을 피 같은 어둠 몰려온다
박철, 개화산에서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한 사내가
껌을 밟고 섰듯 우렁차게 먼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작은 구릉으로 어깨를 굽히고 앉았으나
부러울 것 없네 손자 손녀도 우습게 매달리고
때론 사이클 탄 이가 우주로 떠오를 듯 달려 나가기도 하니
언덕에 섰는 갈참나무나 자귀나무도 마음이 연해
별다른 벌레들 기어들지 않고
청설모며 족제비가 종갓집을 이루는 터
내가 오늘 먹을 걱정에 터벅거리며 산을 내려오자
산은 슬며시 나의 옷깃을 잡으며
곧 볍씨 뿌리는 들판이 될 것이라 귀띔을 한다
따뜻한 바람을 모아 군불 지피는
끝내 고향이 되어버린 아우 같은 산
머리 긁적이며 돌아보니 오솔길은 발장난을 치고
묵은 꽃향기 수북이 손등처럼 쌓여 있다
문태준, 병원 흰 외벽 아래
병원 흰 외벽 아래 나무 의자가 몇 개 앉아 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의자도 있고 목발을 짚은 의자도 있다
얼굴이 얼금얼금 얽은 의자는 늦게 와 앉아 있다
조용한 시간도 의자에 앉는다
물뿌리개에선 밝은 볕이 쏟아진다
물뿌리개에선 밝은 볕이 계속 쏟아진다
앉을 데가 마땅치 않아 한 켠에 슬그머니 쪼그려 앉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