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감에서였는지 책임감에서였는지 그래도 대장인 봉필이가 배낭을 벗더니 튀어나갔다. 그러나 이미 겁을 먹고 다리가 풀려 버린 봉필이는ㅡ그런 봉필이라면 나라도 이겼을 것이다ㅡ 그 사내가 내지른 한 방에 힘없이 나가떨어지더니 코피를 쏟았다.
아는 사람은 안다. 10대 1로 이겼느니 하는 소문이 소문만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오합지졸들이라면 10대 1이 아니라 100대 1이라도 절대고수와 싸울 배짱을 가진 넘은 한둘일 뿐이다. 나머지는 도망갈 구실만 찾고 있는 넘들인 것이다. 우리가 그랬다. 봉필이가 그렇게 당해도 도무지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우리가 놀았던 바닷가로 끌려갔다. 그곳이 도망 가는 걸 막기가 좋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걸으니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머리도 어느 정도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황을 정리해 봤다. 지금 가만 있으면 우리 모두 개 맞듯이 맞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고, 팔선녀들도 어떻게 될지 몰랐다. 무서운 것은 봉필이가 끝까지 그냥 맞고 있을까, 였다. 맞다가 악에 받혀 특유의 야성이 살아나면 진짜 죽도록 싸울 수도 있는 놈이었다. 거기다가 커플이 된 말순이까지 있었던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간이 배밖으로 백 리나 마실 나온 넘이어야 하는 내가 지금 여기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봉넘들에게 지금까지 제대로 된 깡다구를 보여준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었다.
두렵지만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 정 안되면 죽기 살기로 덤비고, 죽도록 맞자! 그게 결론이었다.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아무리 비겁한 넘이라도 가능하지만, 고통을 견뎌내는 것은 진정 간 크고 깡다구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관운장은 화타가 뼈를 긁어내는 데도 태연히 바둑을 뒀다고 했다. 어차피 감당해야 할 고통이라면 늠름하게 견뎌야 남자였다.
우리는 팔선녀들과 함께 무릎이 꿇려졌다. 나는 시봉넘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꼼짝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그 사내에게 갔다. 마지막으로 협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행님요, 무포에 박대포행님 압니꺼?”
“아는데, 와?”
나는 ‘박대포’라고 그때 무포에서 제일 잘 나가는 깡패의 이름을 팔았다ㅡ나이도 그 사내와 비슷할 것이었다. ‘박대포’는 날아다니며 싸운다는 전설의 깡패였다. 한 방 맞으면 대포에 맞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박대포’였다. 무포가 아닌 어디라도 ‘박대포’ 모르면 깡패도 아니라는 말도 돌았다.
“절마가 대포행님 동생입니더.”
“이 ㅇㅇ놈이 족보 따묵기 하나? 대포 글마하고 내, 빵에서 몇달 같이 있었다, 와 임마?“
본 적도 없다는 박대포의 동생으로 봉필이를 둔갑시켰던 나는 할말을 잃었다. 사내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손에는 수건을 감고 있었다. 그것은 손을 다치지 않고 제대로 패겠다는 뜻이었다. 무엇이라도 움켜쥐면 주먹에 더 힘이 들어가게 마련이었다. 우리를 건드리면 박대포가 쳐들어 올 수도 있다고 은근히 위협하려던 내 작전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박대포한테 그래라. 정ㅇㅇ 동생 건드렸다가 디지게 맞았다고!”
그러고 보니 대장이란 넘과 정ㅇㅇ는 많이 닮아 있었다. 그넘이 형 하나만 데리고 잽싸게 와 버린 것이었다. 애들을 동원하는 데 1시간 이상이 걸릴 거라던 내 계산은 맞았으나, 다른 변수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성과가 영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까이서 보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려움이 많이 가시고 있었다. 나를 영 죽이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ㅇㅇ는 손에 수건을 다 감고 스텝을 밟으며 몸을 풀고 있었다. 완전히 권투선수였다.
“행님요! 내가 대장이고, 절마들은 내가 시키는 대로 했고요. ㅇㅇ넘들이 맞을 짓을 했고요…… 그라이 우리 둘이서마 붙으머 안되겠십니꺼? 내가 죽든 말든요!“
“이 ㅇㅇ 봐라!”
내 제안이 같잖다는 듯이 날아온 한 방이 광대뼈에 작렬했다. 나를 죽이고도 다른 애들을 가만 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뒤로 발라당 나자빠졌다. 이제는 져서는 안되는 이유가 생겼다. 일어나면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반팔 티를 벗어 던지는데 옆구리에 또 한 방이 들어왔다. 나는 배를 움켜쥐고 고꾸라졌다.
두대를 맞고 나니 아픔이 두려움을 상쇄시키고 있었다. 아픔만 견디면 되니 이제는 할만하다 싶었다. 일어서면서 바지도 벗었다. 나는 바로 날씬한 알몸이 되었다.
왜 바지를 벗었는데 바로 알몸이 됐는지 궁금해 할 싱거운 분들에게 답변한다. 그 즈음부터 나는 팬티를 입지 않았다. 팬티 살 돈을 겉옷 사는 데에 보태기 위해서였다. 내가 팬티를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누가 안단 말인가. 나에게는 보이는 것이 안 보이는 중요부위보다 중요했다. 팬티는 앞으로 입지 않을ㅡ사지 않을ㅡ 생각이었다. 내가 완전한 알몸이 되어 덤비자 정ㅇㅇ이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내가 옷을 벗은 데에는 곧 피투성이가 될 판이라 옷을 버릴 염려와ㅡ제법 비싼 옷이었다ㅡ, 이 자리에서 죽겠다는 뜻이 들어 있었다. 어차피 곧 죽을 넘이 뭐가 부끄러운가.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것이고, 내가 죽기 전에는 다른 애들은 절대로 못 건드린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 알몸 투혼에 질렸는지 정ㅇㅇ의 주먹이 좀 약해진 듯도 했다. 그렇다고 주먹질을 멈춘 것은아니었다. 나는 한대도 못 때리고 샌드백처럼 얻어 맞으면서도 줄곧 기회를 노렸다. 맞을수록 오기도 생겼다. 내 몸은 피투성이었다. 코피는 진작부터 쏟아지고 있었고, 입 안이 터져 고이는 피 때문에 수시로 침을 뱉아야 했다. 그러나 자빠지고, 엎어지면서도 끝내 일어났다. 발가벗고 피투성이로 싸움질이라니!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기이하고, 기괴한 장면들이었을 것이다.
그쪽 넘들이 속속 도착해 시봉넘들을 지켰고, 시봉넘들과 팔선녀들 모두가 내가 얻어맞는 것을 울면서 보고 있었다. 눈두덩이 부어올라 눈을 뜨기도 힘들었지만 그런 것들은 보였다(팔선녀 가시내들은 눈을 감고 있든지 해야지 왜 내 알몸을 계속 보고 있었을까? 응큼한 가시내들!).
나도 죽을 힘을 다해 덤비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ㅇㅇ도 지쳐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숨도 헐떡이고, 움직임도 느려지고, 주먹도 약해지고 있었다. 내 작전은 하나. 딱 한 군데만 노렸다. 일단 붙잡아야 되는데 정ㅇㅇ가 워낙 빨라서 아직 한번도 붙잡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