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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조각달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피 말리는 거역으로
하얗게 뜬 새벽
거짓말처럼
죽은 자들 속으로
당신은 떠나가고
나는
하얀 과거 하나 더 가졌다
당신 묻을 때
내 반쪽도 떼어서 같이 묻었다
검은 하늘에
조각달이 피었다
김왕노, 첫과 끝
나에게도 내 몸의 첫인 손가락과 끝인 발가락이 있다
나는 그러니 첫과 끝의 합작품이다
나의 첫인 손을 내밀었다가 그 끝인 발로 이별하기도 했다
이 수족으로 나는 한 여자에게 첫 남자와 끝 남자이기를 꿈꿨다
나의 첫과 끝으로 사랑을 찾아가 내 사랑의 첫과 끝을 어루만졌다
너도 너의 첫과 끝으로 나의 첫과 끝이 되곤 했다
그 첫과 끝이 있기에 우리는 부둥켜안고 전율하고 눈물이 났다
너는 너의 첫을 내게 주므로 나의 끝이기를 바랐다
너의 첫 키스, 첫날밤, 첫 요리, 첫 꽃을 주어 나의 끝이기를 바랐다
다가갈수록 자초지종인 듯 내게 주는 너의 첫
그 첫이 너의 끝으로 나의 첫으로 이어가는 징검다리인줄 안다
허형만, 흔적
이 밤도 잠 못 이루며
몸 뒤척거리는 사람이 있다
태양의 손 닮은 연잎은
겨자씨보다 작은 물방울 하나도 가슴에 품지 않는다
연잎은 온전히 제 갈 길을 내 주고
물방울 하나 지나간 자리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사람만이 어쩐 일인지
건듯 부는 바람결에도 흔적을 만들며
스스로 아파한다
윤성택, 여독(旅毒)
여행은 여독에 이르러 생을 투병한다
늙은 시간은 때때로 추억을 꺾어
불을 지피지만 우리는 덜 마른 이정표를 위해
검은 잉크를 눈동자에 찍는다
카메라에 번지는 날이 화소에 고이면
끈질기게 자라는 시간들, 무성한 청춘이
한때의 파일로 빽빽하게 끼인다
그러니 순조롭게 사람을 잊는다는 건
그 경로가 당신의 빈 폴더에 있기 때문이다
떠나고 두고 온 것은 언제나 다가올 것의 표정을 짓는다
여행을 앓는 사람이
사라진 계절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다
김명인, 아무 일 없이
창밖엔 구름 조금, 어느새 먹구름 부풀어도
아무 일 없이 하루가 간다
후두두둑 빗방울 져서 언덕길로
하나둘 우산들 오르내려도
땅거미나 갈아붙이니 일없이 완강한 하루
묵혀두는 우물이란 없으니
오늘의 수위를 지키려고
누군가 치약처럼 얼룩을 짜 보태고 있다
지울수록 안부가 궁금해져
어제 그제 어머니를 뵈러 가고 오던
풍기 인애의 요양병원
그 언덕길에 피었던 꽃 지고 있던 양귀비
꽃밥 위에 주저앉던 나비 한 마리
경계 문지르며 날아간 서쪽
출처가 분명한 내 하루의 돌팔매들
던지면 금방이라도 실금을 받아 안을
허공 속 유리 물고기 한 마리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느러미 움찔거리다 제자리에 멈춰 있다
내몰린 하루가 유리창 밖에서
오늘의 어둠 더미로 고여 썩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