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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첫 눈
밤새 그림을 그렸다
흰 새들을 그렸다
그 중에 제일 그리운 새
한 마리 오려 보냈다
아침 창을 여니
만 마리의 흰 답장이
날고 있구나
이병률, 인기척
한 오만 년쯤 걸어왔다며
내 앞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면 어쩔테냐
그 사람 내 사람이 되어
한 만 년쯤 살자고 조른다면 어쩔테냐
후닥닥 짐 싸들고
큰 산 밑으로 가 아웅다웅 살 테냐
소리소문 없이 만난 빈 손의 인연으로
실개천 가에 뿌연 쌀뜨물 흘리며
남 몰라라 살테냐
그렇게 살다
그 사람이 걸어왔다는 오만 년이
오만 년 세월을 지켜온
지구의 나무와, 무덤과, 이파리와, 별과
짐승의 꼬리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넓이와 기럭지라면
그때 문득
죄지은 생각으로
오만 년을 거슬러
혼자 걸어갈 수 있겠느냐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만 개의 밥상을 차려
오만 년을 노래 부르고
산 하나를 파내어
오만 개의 돌로 집을 짓자 애교 부리면
오만 년을 다 헤아려 빚을 갚겠느냐
미치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 봄날
마알간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늘지게, 그늘지게 사랑하며 살자고
슬쩍슬쩍 건드려온다면 어쩔 테냐
지친 오만 년 끝에 몸 풀어헤친
그 사람 인기척이 코앞인데
살겠느냐
말겠느냐
전동진, 나무, 꽃을 앞세우고
꽃나무, 꽃은 나무를 앞서 있다
있다는 것만으로 전체가 되고
자체로도 화두(花頭)다
오직 꽃, 나무는 말
꼬리 늘어뜨린 나무 푸른 그림자
꽃은 시들고 그림자만 서 있다
꽃은 씨가 되고 그림자 혼자 서서 푸르다
꽃은 시가 되고 곧게 늙은 그림자는
꽃의 말을 공중에 옮겨 적는다
하늘 높은 날
코스모스 떠난 코스모스가 바람을 탄다
무심필(無心筆)이다
황학주, 우물터 돌
영원을 지나온 듯이
하늘을 봤다는 듯이
운다는 것도
웃는다는 것도 맞다
빨랫방망이로 두드려놓은
맑은 물이 놓였다
눈으로 어루만지며
나는 어루만지며
검은 치아 흰 치아를 차례로
올려놓는다
물소리
두드리는 돌에서 난다
돌에서
물소리 난다
진수미, 열리지 않는 달의 노래
달은 잘 열리지 않는다
그게 그의 속성이다
'속성'이라는 낱말은 핀셋으로 집어낸다
'달'이 따라온다
낱말의 사닥다리
우리는 그걸 타고 오르지
불규칙한 사다리 우린 동시에 발을 헛딛는다
낱낱으로 흩어졌다, 뭉쳤다, 구르는 재미
모든 결속에는 깨는 구석이 있다
킥킥 웃어대는 유리창의 실금처럼
먼 우주의 광원, 우리들은 퍼져나간다
허공에는 원터치 캔이 빛나고
엄마는 자장가 끝에 이야기를 얹어주신다
말 안 듣는 아이는
수염 난 망태기 아저씨가 업어간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