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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꽃밭이라는데
꽃에 앉았던 나비가 포르르 날아
아무렇지도 않게 내 가슴에 앉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때문에 나는 놀란다
움직일 수도 없고 나비를 잡을 수도 없다
살인자를 쳐다보는 아기의 푸른 눈동자
그 속에 내가 비친다
나는 교묘히 머리를 써서 나비를 잡을 수도 있고
한 송이 향기로운 꽃인 듯 아량을 베풀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때문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어리석게 손을 휘젓는 바람에 나비는
가볍게 날아가 버렸다
무게도 없는 나비가 잠깐 가슴에 앉았다 날아갔는데
한순간이 바윗덩어리보다 무거웠다
강경호, 적막이 푸르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여름 쑥부쟁이 하얀 꽃그늘에
온몸에 초록 페인팅을 한 사마귀 한 마리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단란주점과 노래방에 둘러싸인
도심의 작은 숲에 찾아온 것만으로도
눈물겨운데
쌀쌀한 날씨는 저물어가고
거미줄 한 번 흔들리지 않는
날벌레 한 마리 날지 않는 정원에서
두 손에 글러브를 낀 채 주먹 단단히 쥐고
당랑권 품새로 대책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마귀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적막하다
언제 끝날 싸움인지도 모르는 기다림과
끈질긴 적막이 푸르다
정일근, 여름비
은현리 대숲이 비에 젖는다
책상 위에 놓아둔 잉크병에
녹색잉크가 그득해진다
죽죽 죽죽죽 여름비는 내리고
비에 젖는 대나무들
몸의 마디가 다 보인다
사랑은 건너가는 것이다
나도 건너지 못해
내 몸에 남은 마디가 있다
젖는 모든 것들
제 몸의 상처 감추지 못하는 날
만년필에 녹색잉크를 채워 넣는다
오랫동안 보내지 않은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사람
푸른 첫줄 뜨겁게 적어 놓고
내 마음 오래 피에 젖는다
강은교, 막다른 골목
막다른 골목을 사랑했네, 나는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나의 애인을 지독히 사랑했네
막다른 골목에서 늘 헤어지던 인사
막다른 골목에서 만져보던 애인의 손
끝없는 미로의
미래의 단추를 사랑했네
오늘밤은 미로에 갇힌 애인의 꿈을 불러보네
애인의 꿈속을 뛰어다니네
풀처럼 풀떡풀떡 뛰어다니네
사랑하는 나의 애인 사라진 벼랑
아, 숨 막히는 삶
이영광, 두부
두부는 희고 무르고
모가 나 있다
두부가 되기 위해서도
칼날을 배로 가르고 나와야 한다
아무것도 깰 줄 모르는
두부로 살기 위해서도
열두 모서리
여덟 뿔이 필요하다
이기기 위해
깨지지 않기 위해 사납게 모 나는 두부도 있고
이기지 않으려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모질게
모 나는 두부도 있다
두부같이 무른 나도
두부처럼 날카롭게 각 잡고
턱밑까지 넥타이를 졸라매고
어제 그놈을 또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