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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림, 은어(銀魚)
동장천 은어를 닮은 아이가 귤껍질을 까서
개미에게 아파트를 지어주고 있다
이마가 맑고 눈이 순한 사내아이가
화분에서 혼자 기어나와 길 잃은 개미를 사랑해서
베란다에 햇살 줄기가 명주실로 쏟아져 내린다
천리향 향기를 마시고 햇살이 마들렌처럼 통통해진다
통통한 봄 햇살을 받아먹은 아이
은어가 되어 옆구리를 희번덕이며 헤엄쳐 간다
폭포수 같은 햇살 속을 날아 천리를 간다
김윤현, 어둠
어둠이 내리자 앞산은 자신부터 어두워졌다
어둠이 된 앞산은 작은 나무들을 안아주었다
키 큰 나무를 품에 안았을 때는 완전히 어두웠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 되자 뒷산도 앞산을 따라 했다
밤이 깊어지자 앞산도 뒷산도 볼 수 없었다
개 짖는 소리 들리지 않아 어둠은 더 깊어졌다
내 몸도 마음도 어둠이 되었다 참 평온했다
별들 어디론가 살그머니 물러나 좋은 밤이다
장석남, 얼룩에 대하여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집으로 갈 때
천수천안(千手千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꿈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천양희,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어떤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막무가내 올라간다
고비를 지나 비탈을 지나
상상봉에 다다르면
생각마다 다른 봉우리들 뭉클 솟아오른다
굽은 능선 위로
생각의 실마리들 날아다닌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바람소리
생각(生覺)한다는 건
생(生)을 깨닫는다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생(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생(生)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상에 없어
생각을 버려야 살 것 같은 날은
마음이 종일 벼랑으로 몰린다
생각을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강세화, 소주(燒酒)
술 한잔 마시는데에
너무 많은 의미는 지겹다
둥굴둥굴 살자는 세상이
너무 많이 기울어 있으니
세상에 한결 같은 건
소주 맛을 쳐줄까
도시에 내린 어둠은
너무 오래 잠을 자고
이리 저리 얽힌 매듭이
너무 깊이 조여 있구나
우리는 소주맛에 빠져
마냥 젖어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