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저 우주왕복선의 대참사 _ Space Shuttle Challenger disaster] 먼저 챌린저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발사 중인 챌린저호 입니다.
챌린저 우주왕복선은 1983년 4월 4일, 컬럼비아호 다음으로 실제 우주유영에 투입된 우주왕복선 중 두번째의 우주왕복선입니다.
즉, 우주왕복선 중 첫번째와 두번째 모두 폭발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총 5기의 우주왕복선 중,
세번째는 디스커버리(Discovery) 우주왕복선
네번째는 아틀란티스(Atlantis) 우주왕복선
다섯번째는 인데버(Endeavour) 우주왕복선이며,
이 3기는 모두 임무를 완벽히 수행 후 미국 나사의 창고에 고이 모셔져 있습니다.
영화 그래비티에서는 익스플로러라는 가상의 기체가 나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 챌린저호 설명
최초비행일 : 1983년 4월 4일
최후비행일 : 1986년 1월 28일 (폭발참사)
수행임무수 : 10회
지구주회수 : 995회
우주체류일 : 62일 8시간
마지막 임무 휘장
휘장의 의미는, 플로리다에서 발사되어 챌린저호를 통해 수행해야 할 임무 중 하나인 헬리혜성의 관찰까지 그려넣었으며,
최초로 전문적인 우주비행사가 아니라 일반인 과학선생님으로 참가하게된 맥컬리를 기리기 위한 상징적 사과모양도 있습니다.
미션 넘버는 STS-51-L 이고, 주 임무는 인공위성의 궤도진입이었습니다.
1. [개 요] -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1986년 1월 28일 임무를 위해 플로리다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되어
발사 후 73초만에 고체연료로켓의 O-Ring의 추운날씨로 인한 구조적 결함으로 공중폭발되어 승무원 7명이 전원 사망한 사고
2. [임 무] - STS-51-L (우주왕복선 프로그램 중 25번째 비행)
- 주 임무는 데이터 추적 및 새로운 중계기술을 선보일 인공위성(TDRS-B)의 궤도 진입
- 헬리혜성의 관측 및 데이터분석용 위성 탑재(SPARTAN-203)
- 우주에서의 원격 화상강의 진행 _ 맥컬리 선생님으로부터 우주로부터 원격으로 과학강의 예정
- 우주에서의 색소폰 연주 _ 개인적인 임무
- 유체 역학 실험 (FDE)
- 상 분할 실험 (PPE)
- 임무 모두 실패
3. [승무원]- 기장 : 프랜시스 스코비
= 미국 국적으로, 당시 46세.
미 공군 중령으로 베트남전쟁 때 전투조종사로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
애리조나 대학에서 항공우주학을 전공, 이미 1984년에 STS-41-C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낸 우주비행사였습니다.
이번이 두번째의 우주 임무 수행.
- 조종사 : 마이클 스미스
= 미국 국적으로, 당시 40세.
미 해군 대령으로 사후에 승진합니다.
미 해사를 졸업하고, 베트남 전쟁에 해군으로 참전하고, 비행훈련을 받아 해군 테스트파일럿을 역임하고,
1980년 5월 우주비행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이번이 첫번째 임무였습니다.
폭발당시 가장 마지막으로 관제센터에 메세지를 보낸 비행사였고,
그 내용은 "어--오-" 입니다.
- 미션전문가 : 앨리슨 오니즈카
= 미국 국적으로, 당시 39세.
사상 최초 아시아계 미국인 우주비행사입니다.
공군 중령으로 상당한 비행시간을 기록한 베테랑 비행사였으며,
1979년 나사 우주비행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1985년 STS-51-C 미션으로 디스커버리호를 탑승하고 74시간이나 우주에 이미 갔다온 경험자였습니다.
이 때가 진정 아시아계 인으로는 최초의 우주유영이었죠.
사 후 대령으로 승진했으며, 자기 고향인 하와이에 묻힙니다.
- 미션전문가 : 앨리스 알랜 레스닉
= 미국 국적으로, 당시 36세의 여성. 유대인.
미 국군 소속이 아닌 민간 업체 소속의 엔지니어로 근무했습니다.
대학 입학당시 미 전역에서 SAT로 여성 수석을 차지했을만큼 수제였으며,
여러 대학에서 공과계열을 전공했습니다.
이미 1984년에 이 챌린저호를 타고 STS-51-L 임무를 수행한 경력이 있으며, 이번이 두번째 우주유영 예정이었으나,
폭발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폭발 후 2분간 오니즈카와 레스닉은 바다로 떨어지는 동안 몇가지 증거로 인해 살아있을거라 추정하게 됩니다.
즉, 조종의자와 함께 콕핏에서 폭발되어 나와, 바다로 떨어지는 동안 의식이 있었을거라는 말이죠...음....
- 미션전문가 : 로널드 맥네어
= 미국 국적으로, 당시 35세의 흑인.
미 국군 소속이 아니라, MIT대학 박사출신 물리학자입니다.
1984년 STS-41-B 임무로 이 챌린저호를 타고 우주를 다녀온 경험자이며,
당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는 두번째였습니다.
이 맥네어는 당시 작곡가 친구의 부탁으로 우주에서 색소폰 연주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 기술전문가 : 그레고리 브루스 자비스
= 미국 국적으로, 당시 41세.
미 공군 대위로 위성과의 통신을 위한 페이로드 전문 엔지니어입니다.
실제 인공위성 통신채널쪽으로 당시 상당한 전문가였으며, 자신의 연구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고 후 바다에 빠져있는 앙복선 차체인양 당시,
자비스의 몸이 함께 바다에 떠올라 다시 가라앉으면서 자비스는 그 후 마지막 잔해복구 스케쥴 때
시신을 발견하여 수습하게 됩니다..
- 과학교사 : 샤론 크리스타 맥컬리프
= 미국 국적으로, 당시 37세. 민간인 과학교사.
맥컬리는 사상 최초의 여성 민간인 우주비행사였습니다.
1985년 나사에서 과학교사 모집 소식을 듣고 지원,
11,000:1 의 경쟁률을 뚫고 우주비행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나,
안타깝게도 폭발로 인해 사망하게 됩니다.
"I cannot join the space program and restart my life as an astronaut,
but this opportunity to connect my abilities as an educator with my interests in history
and space is a unique opportunity to fulfill my early fantasies."
- Sharon Christa McAuliffe
7명의 챌린저호 영웅들입니다.
이 7명의 우주비행사들은 모두 미국국적을 가진 미국인이며,
각각의 의미로 모두 미국에서 상당한 추모의식이 치뤄졌고,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학교, 지역, 사회공원 등등 곳곳에 기념을 하고 있습니다.
4. [사고의 직접적 원인]임무를 위해 이륙하는 챌린저호
단도직입적으로 사고의 직접적 원인은 사람의 잘못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발사 전 회의 때 발사당일 예상치못한 추운 날씨로 인해 고체연료로켓 O-링 부품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을거라는 것을
인지한 로켓제작사(치오콜社)의 엔지니어들이 발사연기를 몇 차례 요청하였으나,
나사와 치오콜사의 고위관리자들은 엔지니어들의 요청을 무시하고 발사를 강행,
결과적으로 엔지니어가 우려했던 곳에서의 문제로 고체연료로켓이 폭발하여 우주왕복선이 통째로 산산조각 나버린겁니다.
그 때 나사에서는 하루밖에 남지않은 상황에서 발사를 연기할 과학적인 증거를 대라고 요청했으나,
치오콜사의 직원들은 어떻게 하루만에 그 증거를 댈 수 있겠냐고 반발했고,
당시 치오콜사의 직원들의 데이터에는 이 오-링이 추운 날씨와의 상관관계를 입증할만한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있지 않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나사 직원들은 추운날씨와 오-링의 상관관계에 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무리하게 발사를 지시한 고위관계자(라 쓰고 xxx라 읽는다)들의 발사강행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이 O-Ring이 무엇이냐 하면..
이 사진에 보시다시피, 우주왕복선이 대기권을 탈출하기 위해서
강력한 추진을 할 수 있는 고체연료로 된 로켓을 양 옆에 두 개 장착합니다.
이 엄청난 추진력으로 그 무거운 왕복선과 짐, 메인연료탱크 등등을 하늘 저 위로 쏘아올려댈 수 있는것이죠.
위 사진에 나와있다시피, 고체연료로켓에는 O-링이라 불리는 부품이 들어가
고체연료가 소진될 때 엄청난 고온압력의 배기가스등이 로켓 사이드로 빠져나가지않고
후면부로 빠져나가게끔 유도하기위한 강력한 접합과 압력유지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아주아주 중요한 부품이라는 말이죠.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 오-링은 고무재질로 되어있고,
발사 당일 너무나 추운 기온 탓에 이 고무가 탄성을 잃어 로켓을 완벽하게 접합시키지 못하고 틈을 만들어버려,
그 틈 새로 고온압력이 새어나오면서 로켓이 폭발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이 로켓은 약 2분동안 소진되고 왕복선에서 분리될 예정인데,
이륙 후 73초만에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2분만 버텨주지.....
이 주변에 고무로 된 오-링이 들어가게됩니다.
사고 후 이 부분에서 압력이 새어나왔다고 하네요..
사고 후 회수된 고체연료로켓의 잔해..
사진내 화살표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발사 직후부터 이미 오-링 부분에서 검은연기가 새어나옵니다..
이 고체연료로켓은 불 붙이면 끌 수 없으며, 다 탈때까지 무조건 올라가야 합니다.....
발사 당일, 어찌나 추웠던지 발사대에 고드름이 얼어있습니다..
5. [챌린저호의 이륙, 73초간의 비행과 폭발 과정 그리고 승무원]- 1월 28일 미 동부시간 오전 11시 38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는 1월 22일부터 네 번이나 발사를 연기하게 됩니다.
추운 날씨탓과 그로 인한 연료계통 이상 등등,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 만큼 발사가 연기된다는 점은 순수히 안전을 위한 접근으로는 아주 좋은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몇 번의 발사 연기로 정부관계자 및 나사 고위관계자들의 심정은 불안감과 짜증으로 점철되어 지고,
주변국의 시선 및 당시 전 세계적인 이벤트였던 우주왕복선 발사를 제 시간에 못한다는 것은
또한 미국의 과학기술 이미지에 타격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엔지니어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28일 오전 발사를 강행하게 됩니다.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발사!!
- 0초 : 발사
- 0.678초 : 오른쪽 보조추진로켓(고체 로켓 SRB) 아래쪽에서 검은 연기가 나는 것이 확인됨
- 2.273초 : 연기가 더 이상 뿜어져 나오지 않게 됨
- 3.375초 : 연기가 모두 확산되어 보이지 않게 됨
- 28초 : 주 엔진의 출력을 낮춰 궤도 수정
- 35.379초 : 주 엔진의 출력을 65%까지 높여, 마하 1 돌파
- 51.860초 : Max Q(가장 압력이 높은 지점)에 도달함
- 58.788초 : 오른쪽 SRB 아래쪽에 불꽃이 확인됨.
이는 나중에 기록을 판독하여 확인된 결과로,
당시에는 챌린저 호 내에서도, 휴스턴의 관제센터에서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음
- 1분 0.238초 : 불꽃이 SRB와 외부 연료 탱크(이하, ET)의 연결 부위로 옮겨 붙음
- 1분 4.660초 : ET의 액체 수소 탱크에서 수소가 새어나옴
- 1분 6.764초 : ET 수소 탱크의 압력 저하가 확인됨
- 1분 8초 : 관제센터, 챌린저 호에 출력 증가를 지시함
- 1분 12.284초 : 오른쪽 SRB가 갑자기 바깥쪽으로 밀리는 현상이 관측됨
- 1분 12.525초 : 사후의 분석에 따르면 오른쪽 SRB가 갑자기 가속하였음
이는 선내의 승무원들도 인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 1분 13.025초 : 조종실 CCTV에 기록된 마지막 부분으로
스미스 조종사가 계기판을 보며 "Uh oh"라고 반응함
주엔진의 작동상태나 ET의 압력저하에 대해 의아해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됨
- 1분 13.124초 : ET의 수소 탱크 위쪽 돔이 파손되어 산소 탱크쪽으로 밀려들어감
동시에 오른쪽 SRB가 앞쪽 연결부 방향으로 돌아오면서 ET를 타격함
- 1분 13.162초 : 고도 4만 8천피트(약 15km)에서 고체연료로켓과 왕복선 동체와의 분리,
분리된 고체연료로켓 2기는 따로이 동체비행을 계속함
이로써 고체연료로켓과 왕복선과 외부탱크는 분리되었습니다.
왜 외부탱크 및 왕복선은 파괴되고 고체로켓은 멀쩡하냐면,
고체로켓의 외부강판은 왕복선 및 외부연료탱크보다 훨씬 더 두꺼웠기 때문에,
이 2기의 로켓은 계속적으로 남은 연료를 태우며 비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당시 사고 동영상..
오른쪽 고체연료로켓에서 불꽃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바로 우주비행사 승무원들의 의식은 언제까지 있었나.. 입니다.
위 사진을 보면 승무원들의 캐빈이 폭발과 동시에 밖으로 튕겨져 나옵니다.
그렇다면 과연 저 때 하늘에서 승무원들의 의식은 있었던 것일까요.
강화알루미늄으로 만든 승무원의 캐빈은 아주 강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폭발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 그대로 콕핏과 분리만 된 것이죠.
그러나 폭발당시 약 20G에 달하는 엄청난 가속에 의해 승무원들의 의식은 있을 수 없다고 판단 되어집니다만,
일부 비행사들의 캐빈에서 폭발 후 조작 가능성이 밝혀지면서
사진에 나온 저 때 일부 비행사들의 의식은 있었다고도 판단합니다.
마지막으로 사고위원회에서의 결론은,
이미 콕핏이 폭발되어 튕겨져 나왔을 때 승무원들은 이미 큰 부상에 시달렸으며,
그 때의 의식은 생존을 위한 가능성은 배제할 만큼 절망적이었을 것이라고 결론 짓습니다.
당시 승무원들의 탈출을 도울 어떠한 시스템도 없었고,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기술의 복작성과 과도한 지출 등등을 이유로 마련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산적인 문제만으로 이런 참사가 일어났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당시 나사의 의사결정 과정의 문제가 구조적으로 잘못되어져 있던 까닭입니다.
엔지니어들의 자유로운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탄력성을 잃어버려 정부조직의 일개 우주납품업체 역할만 할 뿐.
좀 더 풀어 설명하자면,
당시 나사 엔지니어들은 약 100만개가 넘는 우주 기술개발을 위한 사전 테스트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 집행부는 완성된 물건을 가지고 역추적해나가는 방법으로 문제점을 고쳐 나가는 테스트 방식을 고수했죠.
그러면 이 복잡한 각각의 기능의 연결에 따른 기능적 결함을 찾을 수 없고,
나중에 더 많은 비용이 들 것이라고 엔지니어들이 항변을 했지만,
이미 위와같은 의사결정구조로 만연된 나사 집행부에서는 예산집행의 문제등등을 이유로 거부하고 맙니다.
뭐.. 이런 거대한 대참사에 하나의 이유만 있을 순 없겠으나,
이런 대참사가 발생되게 된 요인에 인재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다르게 받아 들여집니다.
6. [챌린저호 사고 잔해의 회수]이 챌린저호의 참사는 전 세계가 생중계로 시청중이었고,
당시 관제탑 등등 모든 관계자는 당연히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사고 후 나사는 바로 그 주변 대서양 바다에 비행기 및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고,
바로 구조대를 파견합니다만,
파편이 계속적으로 바다로 하강중이었기에 약 1시간동안 접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참사 후 일주일 동안 국방부, 해안경비대에서 수색 회수작업을 계속적으로 진행하였고,
수중음파탐지기, 다이버들의 다이빙, 원격조작 무인잠수정, 유인잠수정 등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반경 890km내의 바다를 수색하여 잔해를 회수하고 탐색했습니다.
그리하여 3월 7일까지 수색을 진행,
바다의 바닥에서 7명의 시신을 모두 수습하게 됩니다..
그리고 5월 1일을 기점으로, 총 100% 중 약 55%만의 잔해만 회수되었고 나머지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왕복선 동체 잔해..
회수된 잔해 등등..
7. [사고조사위원회와 리처드 파인만의 실험]사고 후 윌리엄 로저스를 위원회 의장으로 한 사고조사위원회가 설립되어 진상조사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부회장은 닐 암스트롱, 그리고 리처드 파인만, 척 예거 등등이 참여합니다.
위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고의 원인은 O-Ring의 결함에 의한 고체연료의 폭발이었습니다.
그러나 사고위원회는 좀 더 넓게 생각하여, 사고에 기인한 모든 영역에 대해 조사를 벌입니다.
그 결과 이미 1977년 이 로켓이 디자인 되었을 때부터, 이 오-링에 대한 부품의 완전성이 불확실했음을 알았으나,
나사 고위관계자와 치어콜사의 관계자들의 독단적인 의사 결정에 따라 이 오-링이 사용되어져옴을 파악,
이런 결함에 대해 가장 심하게 비판해야 될 입장에서의 사람들에 의한 인재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티비프로그램에 나와 얼음물에 고무로된 오-링을 넣고 그 고무가 가진 성질로 인한 밀폐력 저하에 대해 설명하고,
이번 사건은 NASA의 안전문화의 결여로 인해 벌어진 완벽한 인재임을 드러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