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남편은 도박장으로 가서 아침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아예 주말엔 밤을 새우고 그다음 날 들어올 때가 많으니 그러려니 했다.
비도 오고 마음이 착잡했다. 머그컵에 커피 한 잔을 가득 채워 들고 베란다에서 비 오는 소리를 들었다.
차분하게 내리는 빗물이 미영의 눈물 같았다.
주말 아침 다른 집의 삶은 어떤 걸까? 생각해보았다.
출근하지 않는 날이니 이불 속에서 오래토록 끌어안고 있는 부부도 있을 테고, 일박이일로 산으로 들로 여행 가려고 더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짐을 싸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집안 행사로 시댁으로 친정으로 떠나려고 짐을 싸는 가정도 있을테고......
그런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주말이면 피크닉 가방에 먹을 것 싸 가지고 아이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엄마 아빠 손 잡고 놀러 가는 가족이 보일 때면 미영은 세상에서 그게 제일 부러웠다. 소라도 이제 말을 제법하고 유치원도 다니다 보니 친구들에게 들어서 그런지 요즘 들어 놀러 가자고 보채서 걱정이었다.
소리가 잠이 깼는지 눈을 비비며 귀여운 표정으로 엄마를 부른다.
“아고 우리 이쁜 소리, 일어나쪄요?”
“엄마, 우리는 언제 바닷가에 놀러 가?”
뜬금없이 소리가 바닷가에 언제 놀러가냐고 묻는다.
“으, 으응. 아빠가 조금 한가해지면...”
“엄마, 나 저번에 수경이네 집에서 하루 잔 날 있잖아?”
“그래...”
“수경이 아빠는 그날 집에서 자더라? 근데 내가 수경이 보고 우리 아빠는 집에서 안 잔다는 말 안 했어. 잘했지?”
“으, 으응. 그래, 잘했어.”
미영은 목이 메어서 말이 나오질 않아 간신히 대답하고 부엌으로 달려가 따뜻한 물을 조금 마셨다.
“엄마, 근데 우리 아빠는 왜 집에서 안 자?”
“아빠는 일이 많아서 그래.”
“그래도 나도 한 번 놀러 가고 싶어. 친구들 보니까 바닷가에서 아빠랑 손잡고 사진 찍은 것도 보여주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도 꼭 아빠가 옆에 있던데...”
“그래, 아빠가 조금 일이 한가해지면 우리도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어.”
미영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건지 언제나 평범한 일상을 살 수 있는 건지 목이 메어서 더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와 좋은 추억을 쌓아줘야 하는 시기에 남편은 오로지 도박밖에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했다. 가족끼리 제주도라도 한 번 다녀오자고 말했다가 나중에, 라는 단답형의 말을 들은 후로는 놀러 가자는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아무런 의사 표현을 못 하고 살아가는 자신이 답답하고 답답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혜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남편이 아기들 봐준다고 친구들하고 어디 바닷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는데 우리 대천이라도 다녀올까?”
“대천?”
“응, 경숙이도 된대. 전화했더니 남편이 선뜻 다녀오라고 하더라. 경숙이 걘 진짜 남편 하나 잘 만났다니까. 주말이면 경숙인 아예 주방에 들어가지도 않는단다. 남편이 요리를 그렇게 잘한다나...”
뭐라고 계속 말을 하는 데 들리지가 않았다. 눈물이 흐르는데 왜 귀가 안 들리는 걸까? 미영은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을 아무 대꾸가 없자 혜영은 얘? 안 들리니? 안 들려? 끊어봐, 다시 걸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미영은 화장실로 달려가 수도를 크게 틀어놓고 엉엉 울었다. 소리가 들을까 봐 물을 샤워기로 세게 틀어놓고 변기 물도 내렸다.
친구들의 삶이 너무 부러웠다. 일상 속에서 자기들은 그냥 하는 말인데 어떤 말도 미영에게는 비수로 다가왔다. 가슴을 칼로 에이는듯한 통증을 느꼈다. 한참을 울다 거실로 나왔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며 소리가 외할머니 집에 가자고 조른다.
갑자기 친구들과 아무생각없이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래? 그럼 외할아버지가 데리러 오실 테니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랑 놀고 있어. 엄마는 친구들 좀 만나고 올게.”
“응, 엄마. 엄마 재밌게 놀다 와.”
딸 소리에게 미안했지만, 그냥 친구들하고 허튼소리라도 하면서 웃고 싶어졌다.
그래야 살 것 같았다.
혜영의 연애담과 경숙의 재치 있는 입담을 들으며 배가 아프게 웃다가 드디어 바닷가에 도착했다.
“야, 오랜만에 나오니 정말 좋다. 대천은 언제와도 속이 시원하게 탁 트인다니까. 물이 들어와서 그런지, 와! 진짜 더 멋지다!”
“출렁대는 깊고 푸른 바다 좀 봐. 굉장하다.”
“파도 소리는 또 어떻고...”
“야, 우리 셋은 남편들이 다 착한 거야. 주말에 친구들하고 바닷바람 쐬고 오라고 해주는 남편들이 몇이나 있겠니?”
“맞아, 맞아. 돈 잘 벌어오지. 집에 착착 일찍 들어오지. 가정밖에 모르지....이만하면 착한 남편들이지. 우린 다 결혼은 최고로 잘한 거야.”
미영은 그저 웃었다. 굳이 아니라고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무언으로 긍정을 표현할 뿐!
셋이서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회도 먹고 매운탕도 맛있게 먹고 커피 숍으로 이동했다.
혜영의 남성 편력은 또 시작됐다. 그 말 하고 싶어 모이자고 했던 것 같다.
수영 강사 말고도 또 헬스장에서 어떤 회원과 눈이 맞아 사귀고 있다고 했다. 도대체 남자들도 잘도 만났다.
“너는 어딜 가나 남자가 붙나 보다?”
경숙이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난 이상하게 남자가 꼬여.”
“혹시 네가 먼저 남자를 야리하게 쳐다보는 거 아니고?”
경숙은 의심반 호기심 반으로 장난치듯 물었다.
“호호, 그건 나도 모르겠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일수도...호호호.”
그런 저런 이야기들로 한참을 이야기 하면서 배를잡고 웃다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 다들 혜영의 차에 올라탔다.
차 안에서도 이야기는 혜영의 불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미영은 그냥 적당히 웃어주며 그럭저럭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한참 웃고 떠들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의 전화였다.
받지 않으려다 또 전화를 안 받으면 난리가 날 테니 할 수 없이 받았다.
“어디야?”
남편은 이제 집에 왔는지 집에 아무도 없자 화가 잔 뜩 난 목소리로 물었다.
“나 혜영이랑 경숙이가 대천에 간다고 같이 가자고 해서 대천 왔다가 지금 돌아가는 길이야.”
“대천? 얼씨구! 잘 논다. 소리는?”
“소리는 엄마한테 가 있어.”
미영은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며 말했다. 친구들은 남편들이 다녀오라고까지 배려를 해 주는데, 미영 자신은 큰 잘못을 한 듯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한다는 게 친구들에게 부끄럽고 민망해 식은땀이 났지만, 남편은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애를 친정에 맡기고 싸돌아 다니고 지금 애 엄마라는 것들이 할 짓이야?”
“아니, 나 처음으로 이렇게 나온 거잖아. 지금 집에 들어가니까 집에 가서 말해.”
“집을 어디라고 들어와. 여편네가 애를 팽개치고 놀러 다니는 여자는 집에 올 필요도 없어!”
미영의 남편이 하도 큰 소리로 말을 해서 수화기 밖으로 화내는 목소리가 차 안을 울리고 말았다. 그리고 남편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탁 끊었다.
미영은 기가 막혔다. 자유스럽게 사는 친구들과 자신은 너무나 비교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현실이 앞이 안 보이는 길을 걷는 맹인의 심정이었다.
혜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너 남편에게 말하고 나오지 않았니?”
“어, 실은 남편이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오늘 장지까지 따라갔다 와야 할 친구라서 집에 없었어.”
“야, 그럼 전화를 해서 우리 놀러 갔다 온다고 말하고 오지 그랬어. 집에 왔는데 이쁜 마누라가 없으니 화가 나셨나 보네.”
눈치를 보며 혜영이 미영을 다독이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내가 연락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내가 분위기 망쳐서.”
“아냐. 분위기를 망치긴. 그럴 수도 있지.”
경숙인 벌써 두 번째 미영과 만날 때마다 남편과 싸우는 모습을 보고 뭔가 가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미영이 불안해하는 표정을 짓자 동네에 도착해 저녁까지 사주려고 했다가 얼른 미영의 아파트에 데려다주었다.
미영은 서둘러 집으로 가서 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문에서 띠리릭~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내가 급하게 눌러서 잘 못 눌렀나? 생각하며 미영은 다시 한번 천천히 꼭꼭 눌렀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다시 띠리릭~ 하는게 아닌가?
이상하다 싶었다.
다음 회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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