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묶음
꽃잎이 지는 열흘 동안을 묶었다
꼭대기에 앉았다 가는 새의 우는 시간을 묶었다
쪽창으로 들어와 따사로운 빛의 남쪽을 묶었다
골짜기의 귀에 두어마디 소곤거리는 봄비를 묶었다
난과 그 옆에 난 새 촉의 시간을 함께 묶었다
나의 어지러운 꿈결은 누가 묶나
미나리처럼 흐르는 물에 흔들어 씻어 묶을 한 단
유치환, 우편국에서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
여기나 와서 기다리자
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는 유리문 밖으로
연보라빛 갯바람이 할 일 없이 지나가고
노상 파아란 하늘만이 열려 있는데
김용택, 환한 길
새벽 싸리비질 소리에 눈뜨다
등 가득 눈 맞으며 어머님 눈 쓸고 계시다
간밤 쓰잘데기 없는 내 생각도 한쪽으로 쓸어모으시다
아
환한 길 세상으로 멀리 열리다
김예강, 낮은 둥지
아파트 1층 화단
베란다 밖 어린 매화나무에
새가 둥지를 틀었다
꼭 아기 밥공기만 하다
사람 손 눈치 보지 않고
둥지 내려놓고 있는 새
새집 봐요 빨래 널다 말고
식구들을 부른다
아이는 엄마, 주거침입, 사생활침해예요 한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마침 새들이 둥지에 없어서 다행이다
없는 어린 새 깃털을 어루만지기라도 하듯 노모는
하던 일 계속하다 말고 쯔쯧 혀만 차신다
어디 둥지 틀 데 없어서
얼마나 급해서면 그 어린 게
그 어린 게 쯔쯧쯔쯧
세상 물정 아랑곳없이 덜컹
살림 차린 어린 연인
빈 둥지조차 따뜻한데
이사라, 괄호 속의 생
가끔 삶이 마디가 된다
괄호 속의 생을 누가 알까
그것은 빈 세상이 아니고
우리들 속에서 튕겨져 나간 탄력들이
되돌아오지 못하는 것이고
경계는 마냥 가볍게 이쪽저쪽 너울거리고
그들이 살았던
검은 액자들이 속울음처럼 들썩이고
괄호 속의 생은
말없음표의 긴 행렬 속에서 불쑥 튀어 오르는
봉분 같아서
괄호 속의 생은
그냥 빈 세상이 아니고
때로는 앞뒤로 닫히는 삶이 있고
그런 저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