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 낮달
새를 그린다
힘차게 퍼덕이는 커다란 날개
날개를 타고 가는 크레온의 곡선을
그려놓고 다시 보니
새가 없다
다만 찢긴 날개 몇짝
무참하게 방바닥에 흩어져 있다
그리려는 순간에 재빨리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 버린 새
모양이 없는 새
그리고 뒤에 남은 휴지의 구겨짐
창밖엔 헛것처럼 달이 떠 있다
남은 도화지로
누군가 하늘에 오려붙인 새
새가 아닌 낮달이
이병률, 모독
내가 당신을 먹는 풍습에 관하여
할 말이 있다면 당신은 해보라
내가 끔벅끔벅하는 것은
감정을 연장하자는 것도 아니고
소리를 치지 못해서도 아니다
암굴로 데려와 맨발로 당신을 먹는 것은
극지에 모아둔 당신을 일으켜 살기를 채우는 것
깜깜한 당신의 시간을 갈아엎는 것은
환멸의 뼈를 발라 거는 것
먹으면 죽어서 달의 빛이 되고
당신의 비명으로 출처가 남겠지만
당신은 낡아가야 하리라
너무 많은 절박조차도 마르게 했으므로
그러나 끝도 없이 고단했던 당신의 몸
당신을 피할 수는 없었으리라
존재하느라 몸을 떨어 감정을 파먹었던 당신을
당신이 숱하게 피를 먹던 기록을 지우는 것이니
내가 이리도 한사코 먹겠다는 것은 나란히 소멸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찢기면서도 그리 알라
김제현, 지는 꽃
춥고 가난스런
바람 손을 놓고
한 잎 한 잎
어제의
꽃잎이 떨어진다
진실한 빛깔로 타던
그 하늘은
지금 침묵
한 모금 물
찾던 눈 감기고
너무나 조용한 지상
무수히 내려 쌓이는
멀어져 간 전설은
고독이 띄우는
아픈
웃음의 음성이었다
황학주, 능가사 벚꽃 잎
어둠 속에서 여인을 본 날이었다
놀랍게도
이불을 끌어안은 것처럼
빗소리를 바짝 붙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낮술에 취해 비스듬히 베어진 남자가
물 묻은 가지를 짚은 채 여인 옆에 기대앉아 있었다
여인과 잠깐 눈이 마주친 동안
산벚꽃 잎이 날아왔다
빗소리 깔린 길
멀리 데려간 단 한 발자국만큼의 인연을
생이 지켜보고 있는 것도 같다 이미 울다 간 바 있는
봄, 사랑이 결정되기라도 하면
숙명이 책상다리를 하고 노랑 병아리 같은 것을 깔고 앉는
그런 전철이 있는 것 같다
서서히 기울며 지워지는
어둠은 그날 부러지는 소리가 나고 잎도 져 내리었다
한참 후
양쪽 발소리가 다른 여인이
입구 쪽으로 천천히 나가고 있었다
젖은 꽃잎이 날아 내리며 입구를 간신히 비추어 주었다
허형만, 외로운 내음
퇴근 후 어울려 한 잔 하고 늦었다
싶어 서둘러 귀가 했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확
달려들며 온몸을 껴안는 내음
하루 종일 방 안에 갇혀 창밖만 내다봤을
내음, 출근 전 먹다 남은 사과 조각들이
접시 위에서 이미 누렇게 핏기를 잃고 있었다
내가 풍장을 지냈나, 미안해하며
만져보니 이미 흐물흐물했다
온몸을 쥐어짜 향기로 뿜어낸 뒤
한 생을 거두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