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 둥근 길
나무는 자신의 몸속에 둥근 나이를 숨기고 산다
나이테가 둥근 것은 시간이 둥글기 때문이다
시간이 둥근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이 둥글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직선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는 둥근 길이다
둥글게 걷다보면 어디선가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엄지손가락에 나무의 나이테 같은
우리가 걸어갈 그 길을 숨겨 놓은 것이다
이윤학, 하루살이
얼마나 열심히 죽어왔던가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태어났던가
불빛을 둘러싸고
빙빙 도는 하루살이떼는
줄어들지 않는다
타 죽지 않으면
떨어져 죽을 목숨들에게
날개란 무엇인가
삶이 한없이
황홀해 보인다
정진규, 슬픈 공복
거기 늘 있던 강물들이 비로소 흐르는 게 보인다
흐르니까 아득하다 춥다 오한이 든다
나보다 앞서 주섬주섬 길 떠날 채비를 하는
슬픈 내 역마살이 오슬오슬 소름으로 돋는다
찬 바람에 서걱이는 옥수숫대들
휑하니 뚫린 밭고랑이 보이고 호미 한 자루 고꾸라져 있다
누가 던져두고 떠나버린 낚싯대 하나 홀로 잠겨 있는 방죽으로 간다
허리 꺾인 갈대들 물 속 맨발이 시리다
11월이 오고 있는 겨울 초입엔
배고픈 채로 나를 한참 견디는 슬픈 공복의 저녁이 오래 저문다
장석남, 말린 고사리
말린 고사리 한 뭉치
무게를 누군가 묻는다면
하여튼 묻는다면
내 봄날을 살아온 보람 정도라
답으로 준비한다
곰곰히 생각하여도
그러하였으니까
말린 고사리 두어 뭉치 더 담아서
이름난 백화점 봉지에 넣어서
사랑스런 분에게 주었다 치자
또 받았다 치자
잘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며 그 무게가 궁금은 하겠지만
우리들이 한 해 살아온 보람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야
그렇구 말구
말린 고사리
김명인, 침묵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