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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는 꽃을 아네
게시물ID : lovestory_896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4
조회수 : 29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3/22 10:54:01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2c9pAABqjLQ






1.jpg

마종기파타고니아의 양

 

 

 

거친 들판에 흐린 하늘 몇 개만 떠 있었어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은 믿어보라고 했지

그래도 굶주린 콘도르는 칼바람같이

살아 있는 양들의 눈을 빼먹고나는

장님이 된 양을 통째로 구워 며칠째 먹었다

 

어금니 두 개뿐양들은 아예 윗니가 없다

열 살이 넘으면 아랫니마저 차츰 닳아 없어지고

가시보다 드센 파타고니아 들풀을 먹을 수 없어

잇몸으로 피 흘리다 먹기를 포기하고 죽는 양들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면혹시

파타고니아의 하늘은 하루쯤 환한 몸을 열어줄까

짐승 타는 냄새로 추운 벌판은 침묵보다 살벌해지고

올려다볼 별 하나 없어 아픈 상처만 덧나고 있다

남미의 남쪽 변경에서 만난 양들은 계속 죽기만 해서

나는 아직 숨겨온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2.jpg

양문규시래깃국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겨울은 점점 깊어가고

잔바람에도 뚝뚝 살을 내려놓는 늙은 감나무

열락과 고통이 눈 속으로 젖어드는 늦은 저녁

아버지와 시래깃국에 밥 말아 먹는다

 

세상 어떤 국이

얼룩진 자국 한 점 남김없이 지워낼 수 있을까

푸른 빛깔과 향기로 맑게 피어날 수 있을까

또 다른 어떤 국이

자잘한 행복으로 밥상에 오를 수 있을까

저렇게 부자간의 사랑 오롯이 지켜낼 수 있을까

 

어느 때라도 '시래깃국하고 부르면

일흔이 한참 넘은 아버지와

쉰을 갓 넘긴 아들이 아무런 통증 없이

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마주앉아 있으리라

 

세상은 시리고도 따뜻한 것이라고

내 가족 이웃들과 함께

함박눈을 밟고 겨울 들판을 휑하니 다녀와서

시래깃국 한 사발에 또다시 봄을 기다리는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3.jpg

김규성기억

 

 

 

벌초하러 가는 길

문득

 

어릴 적 홧김에 길가의 돌멩이 하나

주인도 모르는 밭에 무심코 차 넣은 생각이 났다

 

나는 부리나케 차를 멈추고

흉가처럼 버려진 자갈밭의 무겁고 날카로운 돌 두 개

양손에 들고 길로 나왔다

 

하늘은 푸르고 들판은 조용했다







4.jpg

이대흠나는 꽃을 아네

 

 

 

나는 꽃을 아네

내가 꺾고 버리지 못한 꽃

꽃은 귀퉁이부터 말라갔네

나는 꽃을 아네

참 많은 꽃을 꺾었네 참

많은 꽃에 꺾였네

한 송이 꺾을 땐 죄스러웠지

또 한 송이 꺾을 땐 운명을 생각 했다네

세 송이 네 송이 될 때엔

꽃을 보지 못했네

나는 꽃을 아네

한 아름의 꽃을 꺾어도 다하지 못할 때

나는 꽃을 꺾지 않았지

나는 꽃을 아네

꺾어야만 순결함이 유지되는 그 비운을

꺾지 않으면 슬퍼지는 그 운명을

나는 꽃을 아네

씨앗으로 담기에는 너무 먼 기쁨

꺾기에는 너무 뜨거운 슬픔

나는 꽃을 아네

나는 꺾네

다 꺾어도 꺾이지 않은 꽃을






5.jpg

도종환

 

 

 

당신이 물결이었을 때 나는 언덕이라 했다.

당신이 뭍으로 부는 따스한 바람이고자 했을 때

나는 까마득히 멈추어 선 벼랑이라 했다

어느 때 숨죽인 물살로 다가와

말없는 바위를 몰래몰래 건드려보기도 하다가

다만 용서하면서 되돌아갔었노라 했다

언덕뿐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은 살았다 했다

당신의 가슴앓이가 파리하게 살갗에 배나올 때까지도

나는 깊어가는 당신의 병을 눈치 채지 못하였고

어느 날 당신이 견딜 수 없는 파도를 토해 내 등을 때리고

한없이 쓰러지며 밀려가는 썰물이 되었을 때

놀란 얼굴로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당신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리로 떠내려가 있었다

단 한 번의 큰 파도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당신을 따라가다 따라가다

그만 빈 갯벌이 되어 눕고 말았다

쓸쓸한 이 바다에도 다시 겨울이 오고 물살이 치고

돌아오지 못한 채 멈추어 선 나를

세월은 오래도록 가두어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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