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덕룡, 만월
밀반죽 한 덩이로
팔천 가닥의 면발을 뽑아내는 사내가 있다
반죽을 치대고 늘이고 꼬고 두들기며
가업을 이은 지 이십여 년
투박한 손끝에선 거미줄 같은 면발이 흘러나왔다
차지고 질긴 면발 가닥 가닥엔
엉겨 붙은 삶의 옹이를
옹이의 속살까지 보듬고 걸어온 이의 담담한 눈빛이
이른 봄의 달빛처럼 환하게 찰랑거렸다
풀치재 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눈이 부셨다. 처음부터 투명한
맑은 빛이 잘랑잘랑 따라왔던 셈인데
터널을 지나서야 알아챈 것이다
누가 이 고요를 흩뜨리는가
문틈으로 들어온 달빛 한 가닥씩 물고 쩝쩝거리던 우리 사남매
주린 배를 달래주던 꿈속 같구나
흔흔해서 눈 감으니
젊은 어머니, 밤새워 돌리는 재봉틀 소리 결마다 곱다
강신용, 아버지
아버지는 없다
고향 마을에도
타향 거리에도
아버지
하늘 높이 불러 보지만
텅
빈
세월뿐이다
정연희, 꽁지의 힘
멧새 한 마리
울음소리 빈 들처럼 텅 비었다
먼 산 건너보는 어린 재구 눈을 닮았다
감탕나무에 앉은
작은 몸이 2월의 바람에 뒤집힐 것 같아
산국 같은 발가락 검은 나뭇가지 움켜쥐고 두 날개 퍼덕거렸다
꽁지를 올렸다 내렸다 수차례 겨우 균형을 잡았다
어미 새는 발치 아래에 배를 뒤집고 싸늘하게 식었다
아홉 살 재구는
큰엄마 옷자락 잡고 하룻길 왔다
사촌형 주먹질에 두 어깨가 움츠러든 작은 새
추녀 끝에 숨죽여 울었다
형 앞에서 날개가 늘 접혀 있었다
작은 날개로 등짐을 날라
박사 형 대신 큰어머니 곁에서 선산을 지키고 있다
그 힘은
저 멧새의 볼품없는 짧은 꽁지에서 나왔다
공광규, 마네킹
우울증에 걸렸는지
그녀는 말이 없다
철 지난 겨울옷을
새 봄 내내 걸쳐 입고
시장 길 한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있는
그 누가 그녀에게
웃음 찾아 줄 것인가
저마다 사는 것이
혼자 몸도 힘이 드는데
이웃과 쇼 윈도우 거리가
천리(千里)처럼 멀었다
신해욱, 모르는 노래
어이. 귀를 좀 빌려줘
모르는 노래가
내 입 안에 가득 고여 있어
해야만 할 어떤 말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떤 이유로도 나는 여기
있어야만 하는데
그렇지만 이건 이미
내가 있기 오래전에 끝난 노래들
나를 지우고
나를 흉내 내는
무서운 선율
이봐. 시간이 이렇게 흐르고 있어
필시 너는 내 편일 테니
나를 좀
이 노래에서 벗겨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