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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공손한 손
추운 겨울 어느 날
점심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박행신, 하얀 철도
파란 하늘에
제트기가 날아가더니
두 줄 하얗게 철도를 만들어 놓았다
하늘 가운데를 가로질러
기다랗게 피어나는 새하얀 철도
나는 그 위에서
하얀 기차를 타고 달린다
설레는 꿈을 안고 기다리는
새털구름을 향하여
푸른 역에서 잠시 쉬기도 한다
이남섭, 첫사랑
독사에 물린 자국이다
해독되지 않아
아직도 몸살 중이다
독사에 물려
잘린 손가락
봄이 되면
또 다시 근질거린다
신덕룡, 사월
쿨럭쿨럭 배꽃 핀다
이건, 이 꽃들은 살아있는 자의 멍에다
혼자서는 결코 벗어버릴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도록
두 팔은 벌려진 채 철사줄로 단단히 묶여
꾸부정한 몸으로
기침하듯 내뱉는 비명이겠다
위로 솟구치려는 야성은 늘 위태로운 법이어서
고개 드는 가지란 가지 모두 참수 당했으니
발치에 수북이 쌓여갈 터이니
하늘은 퍼렇고 봄날은 간다
꽃 진 자리마다 또 한 근심 주렁주렁 매달아야 할
늙은 나무들, 공장에 늘어선
튀밥기계 같다
한평생 달궈져 식을 줄 모르는, 말이 없다
황학주, 고흥
이 길을 지날 때면
솨르르솨르르 눈 밑에 기슭이 번진다
여름이 가는지
귀 안에 물이 든 것 같은 소리
만져보기도 전 어디에서 꽃그늘은 다 잠겨
해안선이 조용해진다 조용해진 문장들
이라고 쓰고 나면 언제나 야심했다 싶은 주소지
노란 불빛에 헌 양재기 부딪는 소리가 외따로 쓸려간다
신발을 들고 돌아서면 발 디딜 데 없이 고요한
더 필요한 것이 모두 젖은 해안선
지나쳐온 고요를 함부로 밟을 수 없는
몸의 습성은 장례지의 바람을 닮았다
유년의 바람을 묻어놓은 바다의 다락방으로
되돌아가는 하루였을까 조가비 하나
희고 파리한 그런 말일까
황금빛 해변이 가장 길어지는 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황홀하게 저린 말이 부리를 떠는 한순간을 위해
멀리 뿌리를 던진다 솨르르솨르르 물결이 들고
갈 곳 없는 마음으로 마음 얻지 못한 모든 노래는
바닷새처럼 가버렸는지
서편 하늘은 가느다래지는 새의 발끝을 하나
조가비처럼 닦고 있다
나, 휘어진 바닷길을 그제야 따라붙는다
배기고 아픈 날들이 가장 잘 업히는
저녁 다도(多島)
가장이 없어 고요한 저녁 다도(多島)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