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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너에게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목숨밖에는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황량한 쇼윈도 같은 나의 창 너머로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영혼의 집 쇼윈도는
텅텅 비어 있다
텅텅 비어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도종환, 대추
지쳐 있는 내게 다가와
몰래 하나씩 먹으라고
김선생이 손에 쥐어준
빠알간 대추 한 줌
함께 단식하는 동료들 생각에
차마 못 먹고
주머니에 넣어둔 채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몸 못 가누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와 바라보는
얼어붙은 겨울하늘 위로
빠알간 대추 몇 알
김춘순, 입술을 오므리는 버릇
입술을 오므리는 버릇이 있는 것들은
달에 대한 기억이 있다
달이 찾아드는 저 꽃의 맨 처음 기억들은
환한 시간에는 늘 오므려져 있다
꽃잎의 어둠들이 떨어지는
환 한 한 낮
어두운 곳에 고여 있는 상처들
어두운 곳과 어두운 것들이 벌어지는 때를 만난다
그러고도 소멸되지 않는 흉터는 꽃이 된다
원래 저 꽃의 씨앗은 달에서 떨어졌다
아득한 들녘, 달빛을 말아 쥐던 밤
구멍과 구멍 사이 바람을 부리던 팽팽한 근육들 풀고
달의 흔적을 할퀴던 손톱자국이 굵어져 생긴 저
물소리 나는 흰 상처에
훌훌 뿌려진 꽃의 씨앗
바람의 뒤를 따라 살짝 꽃잎에 드는 시간
내 입술을 다녀온 혀는
변명이란 단어를 백과사전에서 핥는다
밤에 피었으니
지는 일도 밤에 하겠다
노란 오줌이 흘러내리는 천변에
황급히 구름바지를 올리는
흰 달
이수명,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창을 바라본다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이것이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그 생각이 무엇인지 모른 채
누군가의 생각 속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누군가의 생각을 질료화한다
나는 그의 생각을 열고 나갈 수가 없다
나는 한순간
누군가의 꿈을 뚫고 들어선 것이다
나는 그를 멈춘다
커튼이 날아가버린다
나는 내가 가까워서 놀란다
나는 그의 생각을 돌려보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생각을 잠그고 있다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로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지금 누군가의 생각이 찢어지고 있다
박연준, 빙하기
포개진 두 손이 접힌 나비가 되어
나 모르게 훨훨 날아갈 것 같다
너는 나를 수십 개로 쪼개
여러 개의 방을 짓고
각각의 방에 흩어지게 했지 절대
하나로 모이게 하지 않았지
첫 번째 방에 갇힌 왼쪽 눈이
다섯 번째 방에 갇힌 오른쪽 귀를
그리워하기도 했지
나는 쏟아지고 싶었으나
언 수도처럼 가난했단다
너를 막 그리워하려는데
열두 번째 방에서 흐르던 내가
나라고 불리던 한 조각이
스르르 결빙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