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mGJSfUegXHg
이상국, 자두
나 고등학교 졸업하던 해
대학 보내달라고 데모했다
먹을 줄 모르는 술에 취해
땅강아지처럼 진창에 나뒹굴기도 하고
사날씩 집에 안 들어오기도 했는데
아무도 알은척을 안 해서 밥을 굶기로 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우물물만 퍼 마시며 이삼일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논으로 가고
어머니는 밭 매러 가고
형들도 모르는 척
해가 지면
저희끼리 밥 먹고 불 끄고 자기만 했다
며칠이 지나고 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밤 되면 식구들이 잠든 걸 확인하고
몰래 울 밖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다 먹었다
동네가 다 나서도 서울 가긴 틀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낮엔 굶고 밤으로는 자두로 배를 채웠다
내 딴엔 세상에 나와 처음 벌인 사투였는데
어느 날 밤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빈속에 그렇게 날것만 먹으면 탈난다고
몰래 누룽지를 넣어주던 날
나는 스스로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나 그때 성공했으면 뭐가 됐을까
자두야
한혜영, 트렁크가 트렁크에게
지겨운 나를 개 끌 듯 끌고 어디든 갈 수는 없나
해골만 달랑 넣은 트렁크 덜덜거리며 끌고
유럽으로 간다던 802호 트렁크 부부를 엘리베이터서
본 적이 없나 당신은 일탈, 이탈도 할 줄 모르나
나를 끌고는 대한민국으로밖에는 갈 줄을 모르는 당신
내 뱃속에 꾸역꾸역 선물 옷가지나 챙겨야 되는 줄로 아는
반세기를 살고도 아직도 고지식한
부부싸움을 하고도 집 바깥으로 나간 적이라고는 없는
그 쪼그라진 쓸개랑 간이랑 내장 훌훌 나한테 쓸어 담아
덜덜거리며 끌고 갈 수는 없나
없으면, 내가 당신에게로 들어갈 수는 없나
인간 트렁크인 지퍼 망가져 쉽게 열리지도 않는
트렁크 안에 트렁크
트렁크 안에 트렁크
뚜껑 열기가 그렇게 어렵나 어지간해서는
내가 당신을 열 수 없는 것처럼, 망가진
피천득, 가을
호수가 파랄 때는
아주 파랗다
어이 저리도
저리도 파랄 수가
하늘이, 저 하늘이
가을이어라
도종환, 어린이 놀이터
어린이 놀이터에 개나리꽃이 진하게 피었다
동네 아이들은 모두 학교 가고 없고
아이들이 금그어놓고 놀다간
사방치기 그림만 땅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 앞에 서서 폴짝 뛰어 보려다
멈칫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다 폴짝 폴폴짝 뛰어 건넜다
개나리꽃이 머리를 흔들며
깔깔대고 웃다가 꽃잎 몇 개를 놓친다
햇살이 위 꽃잎에서 아래 꽃잎 더미 위로
주르르 미끄러져 내린다
여기서 오 분만 걸어가면
쫒겨난 학교가 있다
이 봄이 지나면 못 돌아 간지 꼭 여덟 해가 된다
걸어서 오 분이면 가는 학교를
이진우, 회사씨
오랜 시간을 당신과 인연을 맺고
당신을 사랑하며 지냈습니다
그날들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당신께 꿈을 드렸고 시간을 드렸고 자유를 드렸으며
가족을 맡겼지요
당신 생각에 잠 못 들던 밤은 셀 수도 없습니다
이제 사직서를 내면서 당신을 잊으려 합니다
당신이 저를 행복하지 않게 해 주어서가 아닙니다
제 마음을 몰라주어서도 아닙니다
당신과 저 사이에는 아무 앙금도 없습니다
굳이 이유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일신상의 이유, 그 하나만으로 당신을 떠납니다
이렇게 당신을 떠날 수 있어 행복합니다
당신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