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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사랑을 유리병 속에 담아둘까
사랑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는
고독이라는
유리병 속에 담아 둘까
사랑은 너무나도 순간적이어서
마치 미세한 향기 같아서
그대와 잠시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연기처럼 피어올랐다가
이내 사라지기도 한다
정략이 조금 개입된 결혼이
좋은 결혼이듯이
인생은 투명한 순도만으로는
오히려 부서지기 쉽듯이
사랑에도 약간의 허영과 가식이 섞여야
더욱 설레고 뜨거운 것일까
아낌없이 훌훌 태우되
모두 다 들여다보진 말 것
거기엔 뜻하지 않은 화상 같은
애증이 끼어들고
권태와 변질의 낭떠러지가
눈앞에 당도하느니
아름다운 사랑의 등성이에
한나절 외줄을 타고 오르다 보면
거기엔 바람만 쓸쓸히 불고
바위틈엔 에델바이스 대신
이런 난해한 악마가 기다리고 있느니
사랑을 유리병 속에 담아 둘까
고영민, 오지
하루 한 번 가는 버스를 탔다
산언덕을 넘자 거짓말처럼 마을이 있었다
굴피나무집 부엌엔
송아지가 살고
장정들은 소 대신 쟁기를 끌며
산비탈 약초밭을 일구고 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아무 것도 하지 말자고 중얼거렸다
골풀이 수북한 경사지 아래
흑염소 울음소리가
검었다
밤이 되자 산 하나가 죽고
굴피나무집에
등잔이 켜졌다
임채성, 노래하는 사람
앵돌아진 음표 같은
동물원 옆 미술관 길
도시의 소음에 맞선 뼈만 남은 한 거인이
노랜 듯, 속울음인 듯 허밍을 토하고 있다
반올림한 꿈일수록 어깨는 더 무거워져
한 음 내린 하늘 아래 허리가 굽어진다
반주도 갈채도 없는 는개 속의 저 아리아
삼십 촉 별은 뜬다
눅눅해진 가슴에도
가단조로 울려오는 무채색 저녁 앞에
어느새 조명을 밝힌 가로등이 환하다
이영춘, 길에 누워 있는 입
길바닥에 웬 숟가락 하나가
떨어져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심히 밟고 간다
누군가 한 생애
담금질하던 입
많이 아프겠다
언뜻 한 솥 밥을 먹던 얼굴 하나가
찌그러진 숟가락에
겹친다
방민호, 사랑의 흔적
이것은
나풀거리며 떠다니는
나비
어느 가냘픈 어깨 위에 앉았다
내가 손가락을 살며시 뻗어 잡으려 하자
포르르 날아오르는
또 어느 까만 머리칼 위에 앉았다
내 한숨이 짓는 공기의 파동에
깜박이듯 날아올라
아득한 봄날
하얀 햇살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나비
앉았다
날아오르고
또 어느 꽃 위에 앉아
기억의 손가락을 기다리는
이것은
나비
이 가벼운 질량
이 끈질긴 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