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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흰 웃음소리
내가 한 철 인제 북천 조용한 마을에 살며
한 사미승을 알고 지냈는데
어느 해 누군가 슬피 울어도 환한 유월
그 사미는 뽕나무에 올라가 오디를 따고
동네 처자는 치마폭에다 그걸 받는 걸 보았다
그들이 주고받는 말은 바람이 다 집어 먹고
흰 웃음소리만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북천 물소리가 그걸 싣고 가다가
돌멩이처럼 뒤돌아보고는 했다
아무 하늘에서나 햇구름이 피던 그날은
살다가 헤어지기도 좋은 날이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온몸이 환해진다
금명희, 책들의 거처
책에 대해 물어 본 적이 없었네
손톱만한 어린잎들은 자라 숲이 되었네
숲 근처를 지날 때 잎사귀들은
내게 휘파람을 불어 주었네
몇몇의 잎들에게 호명을 하면
불린 이름들이 손을 흔들며 따라 나왔네
심심한 잎들에게 말을 붙였네
잎사귀들은 입을 열어
또렷한 발음으로 대답을 했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책갈피를 넘기며 말을 했네
나는 나무 냄새가 좋다고 코를 킁킁거렸네
잎사귀들이 소파에 앉아 한참 떠들었네
행간을 걸어 다니느라 부어오른 발목을
나무 그늘에 쉬게 했네
햇살을 갉아 먹은 잎들이 푸른똥을 갈겼네
먹다 남은 햇살은 냉장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해동시켜 공복에 먹을 거라 했네
무성한 숲이 높은 성처럼 든든해 보였네
숲으로 들어간 마른 갈증이
밤새 또 다른 길을 내고 있었네
허수경, 나는 춤추는 중
기쁨은 흐릿하게 오고
슬픔은 명랑하게 온다
바람의 혀가 투명한 빛 속에
산다, 산다, 산다, 할 때
나 혼자 노는 날
나의 머리칼과 숨이
온 담장을 허물면서 세계에 다가왔다
나는 춤추는 중
얼굴을 어느 낯선 들판의 어깨에 기대고
낯선 별에 유괴당한 것처럼
김정남, 마음은 척추를 다치고
마음이 척추를 다쳤으니
세상이 어찌 그늘이 아니겠는가
함부로 돌아누울 수도 없으니
그대가 어찌 나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그대여
머리맡에 놓아둔 물이 다 마르면
내가 그대를 껴안아주리라
마음 약한 별들만 가득한
내 품속 새벽하늘을 보리라
이광석, 바다 변주곡
바다는 제 혼자 다니는 길이 있다
고급 세단 같은 상어가 다니는 길을 비켜
토종 전어 고등어떼 마실 다니는 작은 골목길을 달빛으로 간다
세월의 파편이 된 낡은 기억들 하나 둘 사라지고
돌아갈 수 없는 낯선 길 앞에 바다는 지금 아프다
보아라 물 어디에도 내가 적실 그리움은 없다
각혈하듯 시의 꽃을 피우던 가포 겨울바다도
조개껍데기처럼 개펄에 엎드려 있다
바다가 마지막 종점인 사람들에겐 바다는 더 이상
내 줄 어깨가 없다 세상의 집들이 어둠에 업혀
잠들 때 밤새 뒤척이던 바다는 제가 숨겨놓은
옛길 하나 불러낸다 그 길섶에 문신처럼 박힌 묵은 통증
등지느러미 날 세운 쪽빛 너울로 환급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