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정원미달 사태가 계속되고 있는 기서농고는ㅡ원래 2개 학급이었던 것을 1개 학급으로 정원을 줄였지만 그런데도 미달이었다ㅡ 돌머리들만 간다고 ‘돌고‘라 불리워지고 있었다. 성적이 계속 하강곡선을 그려서 문제였지만 국민학교 때는 판검사라도 될 줄 알았던 막내아들이 그런 학교에 가고, 더군다나 농사꾼이 된다는 것은 엄마와 아버지에게는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내 설득과 협박이 통했던 것인지, 아니면 내 말을 듣고 엄마가 따로 수집한 ‘남매간 사건사고 및 위험사례’들이 근거자료가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며칠 만에 여론은 막내누나의 ‘밥순이 자원봉사’는 절대불가로 돌아섰다. 나의 승리였다.
당연하게도 막내누나와 나의 관계는 향후 몇 년간은 건너지 못할 강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막내누나가 주재하는 ‘김성오 용돈책정위원회’가 즉각 구성된 것이었다. 위원장 격인 누나는 발제를 통해 자신이 알고, 보고, 들은 바로는 무포에 유학해서 자취하는 깡촌넘들 거의 전부가 노스탤지어를 핑계로ㅡ누나는 분명 ‘노스탤지어‘라고 했다. 향수(鄕愁)도 아니고 ‘노스탤지어’라니? 소학교 4학년 중퇴인 아버지와(그래도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서당에는 오래 다녀 한문은 많이 알았다), 한글을 어깨너머로 배운 어머니(그래도 어머니는 가근방에서 유명한 편지대필가였다. 주로 여인들이 안사돈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필해 주었다. 만약 내가 문사로서의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엄마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앞에서 ‘노스탤지어‘를 운운한다는 것은 엄마와 아버지를 욕보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눈만 껌벅이고 있었고, 나는 속으로 누나에게 욕을 했다. 누나의 속셈이 뻔히 보였다. 엄마와 아버지가 뭔 말인지 모르는 말을 쓰므로써 자신이 그 방면의 확실한 전문가임을 과시하면서 신뢰성을 높이려는 속셈이었다ㅡ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공부를 등한시할 수밖에 없고, 머리까지 나빠지게 돼 있다고 했다. 이런 탈선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용돈 예산을 엄밀하게 집행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견물생심일지라도 돈이 없는 데야 어쩔 것인가가 근거 논리였다.
나는 이미 어른이 다 돼서 엄마가 곁에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고, 술과 담배는 평생 가까이하지 않을 것임을 굳게 맹세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어서 누나는 꼭 집행해야 될 내 용돈을 세목별로 산출했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 세목별이라고 해봤자 간단했다. 학교 매점에서 간식으로 하루에 하나씩 사 먹을 수 있는 빵과 우유값과, 1주일에 한 번씩 집을 왕복하는 교통비가 전부였다. 거기다 만약에 필요할지 모르는 비상금 약간이었다.
덧붙여 1주일에 한 번씩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겠으나, 한달치를 한번에 주므로써 돈을 짜임새 있게 쓰는 계획성과 절약정신을 함양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흥청망청 쓰다 곤란을 당하더라도 약속된 날짜에만 엄정하게 예산을 집행하므로써 세상살이가 그리 만만하지 않음도 배우게 해야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일 걸림돌이 엄마이므로ㅡ주중에 한 번씩은 엄마가 내게 와서 반찬 등을 해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됐다. 그때 엄마가 나에게 불법적(?)으로 돈을 건네 줄 수도 있으니 아버지는 엄마의 지갑을 철저하게 감시해야 된다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나는 자신이 고교생활을 3년 먼저 한 선배로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므로 제반문제 발생 시ㅡ특히 금전 지출 문제에 대해선 자신의 심의를 필히 득해야 된다고 했다. 나에게도 도움이 안되고, 집안경제에는 더욱 도움이 안되는 불필요한 지출은 철저하게 차단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사복도 필요하다고 했더니 누나는 여학생도 아닌 남학생이 교복도 있고, 교련복도 있고, 츄리닝도 있는데 무슨 옷이 또 필요하냐며 가차없이 잘라 버리는 것이었다. 무포에서 최고 명문인 무포일고의 학생은 뱃지가 반짝이는 교복이 가장 어울리는 옷이고, 집에서 입을 옷은 지금 옷이면 되고도 남는다고 했다.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누나가 나를 힘들게 만들려고 이렇게 치밀하게 연구하고, 준비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누나가 제시한 바에 따르면 10원짜리 하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적은 금액이라도 유용하려면 빵과 우유도 사 먹지 않고 아껴야 할 판이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나는 아버지에게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데 누나는 할말 다 하고, 지시까지 내리는 것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막내딸 바보‘였던 아버지는 누나를 고등학교까지 시킨 데 대해서 보람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딱 부러지게 내 용돈문제의 결론을 내리는 막내딸이 대견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나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내 용돈은 완전하게 누나의 뜻대로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도 고집이 누나에 못지 않았다. 누나는 핫 라인을 통한 물밑협상을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결코 누나를 내 자취방에 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느니 가난한 3년을 택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나는 용돈을 조달할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내고 말았다. 어차피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