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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국내에서도 그런 일본의 입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미군은 일본에 폭격을 하기 전에, 미리 전단지들을 대규모로 뿌려서 일본인들에게 "우리가 언제 이 도시를 폭격할 테니, 당신들은 피난을 가서 생명을 보존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래는 그 전단지들의 사진과 거기에 적힌 내용입니다.
일본 국민에게 고함
당신 본인이나 친형제 혹은 친구의 목숨을 보전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도움을 바란다면 이 삐라를 읽어주십시오.
수 일 내로 이 삐라 반대편에 적힌 모든 도시,
혹은 일부 도시에 위치한 군사표적에 미군 비행기가 날아와 폭격을 가할 것입니다.
위 도시들에는 군사표적 및 군용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습니다.
군부가 이 승산이 없는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사용할 병기들을 미군은 전부 폭격할 것입니다만,
폭탄에는 눈이 없기 때문에 어디로 떨어질지 모릅니다.
아시겠지만 인도주의적인 우리 미국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쪼록 위 도시들로부터 피난하십시오.
미국의 적은 여러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전쟁에 끌어들인 군부야말로 적입니다.
미국이 구상하는 평화는 여러분을 군부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더 나은, 새로운 일본을 건설할 것입니다.
전쟁을 끝낼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반대편에 적히지 않은 도시에서도 폭격이 있을지 모릅니다만,
조금이라도 반대편에 적혀있는 도시에서는 전부 혹은 일부 지역에서 폭격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경고하겠사오니, 반대편에 적힌 도시들로부터 피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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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 정부는 저렇게 미군이 뿌린 전단지들을 헌병과 경찰 등을 동원하여 모두 빼앗았고, 일본 국민들에게는 미군이 전단지에 독을 발라놓았다고 거짓말을 해서 아예 시민들이 전단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였으며, 혹시 그래도 전단지를 보고 그 내용을 유포하거나 숨겨놓은 사람은 미군의 스파이로 몰아세우며 징역 3년 형에 처했습니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국민들이 미군 공습을 피해 피난을 가는 일조차 법으로 금지시켰습니다. 1941년에 수정된 일본의 방공법(防空法) 제 8조 3항에는 “도시에서 사전 퇴거를 금지하는” 내용이 들어갔고, 이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미군의 폭격을 받더라도 도시를 떠나 피난을 가는 일이 불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도시가 폭격을 받아도 피난가지 말고 계속 일하라는 기사를 실은 일본 신문들. 이건 그냥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습니다.....)
그래도 폭격에 겁을 먹고 일본 국민들이 도망치려 한다면, 일본의 정치인들은 그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한테 식량과 물자 배급을 해주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여 억지로 도시에 남아있게 하는 악마 같은 짓까지 벌였습니다.
한 예로 일본 혼슈 북부 아오모리 현의 지사 카나이 모토히코(金井元彦)는 7월 18일, 방공법의 퇴거 금지 규정을 근거로 7월 28일까지 도시로 돌아가지 않으면 확인되지 않는 인원은 인명 대장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식량과 물자의 배급을 중지할 것이라 위협했습니다.
(피난가는 주민들한테는 배급을 끊어 굶겨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던 아오모리 현의 지사 카나이 모토히코)
전시 하에 가뜩이나 물자가 빈곤한 상황 하에서 배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곧 생존 수단을 잃게 되는 것으므로 어쩔 수없이 시민들은 아오모리 시로 돌아갔고, 카나이가 협박한 최후 기한일인 7월 28일의 하루 전날인 27일 자정 무렵, 아오모리 상공에 나타난 B-29 폭격기가 조명탄과 함께 6만장 정도의 전단을 뿌렸습니다.
마침내 카나이 지사가 돌아갈 시한으로 정한 7월 28일엔 이미 많은 시민들이 도시로 돌아와 있었고 22시 10분, 이오지마를 이륙한 미군의 B-29 폭격기 62기가 아오모리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23시 48분까지 약 1시간 10분가량 이어진 이 폭격에서 신형 M74 소이탄 38발을 내장한 E48 집속탄 2,186발이 투하되어 시가지의 88%인 18,045가구를 불태웠고 1,76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미군이 미리 전단지를 뿌려 예고한 대로 공습의 타격을 받은 아오모리시.)
결국 현지사의 명령으로 도시로 돌아온 많은 시민들이 희생당한 이 아오모리시의 사례는 매우 직접적으로 방공법의 퇴거 금지 규정에 따라 공습 피해에 이른 사례이며, 이 밖에도 도시에서 피난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폭격에 희생된 민간인들이 엄청나게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각종 전쟁 기록 등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2차 대전 당시 일본이 입은 폭격 피해의 대부분은 미군의 인정사정없는 민간인 공습 때문이 아니라 일본인 자신들의 정부가 만든 헬 게이트였습니다.
여기서 혹시 이런 의문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부의 명령이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피난을 못 떠나고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일본 민중들은 억울한 피해자가 아니냐?"
그렇다면 저 위에서 언급한 국민들을 피난가지 못하게 협박한 카나이 모토히코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민중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알아봐야겠죠.
놀랍게도 전쟁이 끝난 이후에 카나이 모토히코는 국민들로부터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955년 효고현 부지사에 당선되었고, 1962년엔 지사 선거에 출마해서 유권자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효고현 지사에 당선되었습니다.
(이 인간, 잘 먹고 잘 살았답니다......)
또한 카나이 모토히코는 1971년엔 일본 자민당의 공천으로 효고현 선거구에서 출마해 참의원에 당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1979년에는 행정관리청(行政管理庁..지금의 총무성) 장관이 되었으며 1983년 정계 은퇴 이후에도 잘먹고 잘 살다가 1991년에 편하게 죽었습니다.
주민들을 피난 못가게 협박해서 미군의 공습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파렴치한 인간에게 정치 권력을 쥐어주는 일본 민중들의 정신 상태는 아래의 영화 내부자들에 나온 대사를 빌려서야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카나이의 사례처럼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권력을 잡았던 인간들은 패전 이후 대부분 정계에 복귀하여 다시 대가리 짓을 하였음으로, 일본 정부가 이후 세대에게 가르친 역사의식은 굳이 캐보지 않아도 불 보듯 뻔할 것이며 고도 성장이라는 화려한 네온사인에 매료되어 저런 자신들의 흑역사는 깡그리 왜곡되거나 혹은 지워졌던 것입니다.
출처 http://blog.daum.net/mybrokenwing/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