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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nJz5had6WHI
하상만, 간장
콩자반을 다 건져 먹은 반찬통을
꺼낸다 반찬통에는 아직
간장이 남아 있다
외로울 때 간장을 먹으면 견딜 만하다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내가 일으키려 할 때
할머니는 간장을 물에 풀어오라고 하였다
나는 들어서 알고 있다 할머니가 젊었을 때
혼자 먹던 것은 간장이었다는 것을
방에서 남편과 시어머니가 한 그릇의 고봉밥을
나누어 먹고 있을 때
부엌에서 할머니는 외로웠다고 했다
물에 풀어진 간장은 뱃속을 좀 따뜻하게 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운을 주었다
할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달라고 한 음식은
바로 간장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었다
수년 째 자식들은 찾아오지 않던 그 방
한구석엔 검은 얼룩을 가진 그릇이 놓여 있었다
내가 간장을 가지러 간 사이 할머니는
영혼을 놓아버렸다 물에 떨어진 간장 한 방울이
물속으로 아스라이 번져가듯
집안은 잠시 검은 빛깔로 변했다
비로소 나는 할머니의 영혼이 간장 빛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자이므로 간장이 입에 맞다
혼자 식사를 해야 했으므로
간장만 남은 반찬통을 꺼내놓았다
조용미,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폭우가 쏟아지는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이 방을 능우헌(凌雨軒)이라 부르겠다
능우헌에서 바라보는 가까이 모여 내리는
비는 다 직립(直立)이다
휘어지지 않는 저 빗줄기들은
얼마나 고단한 길을 걸어 내려온 것이냐
손톱이 길게 쩍 갈라졌다
그 사이로 살이 허옇게 드러났다
누런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치마를 펼쳐 들고 물끄러미 그걸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입은 두꺼운 삼베로 된 긴 치마
위로 코피가 쏟아졌다
입술이 부풀어올랐다
피로는 죽음을 불러들이는 독약인 것을
꿈속에서조차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일까
속이 들여다보이는 창봉투처럼
명료한 삶이란
얇은 비닐봉지처럼 위태로운 것
명왕성처럼 고독한 것
직립의 짐승처럼 비가 오래도록 창 밖에 서 있다
허소라, 관촌에서
관촌에 오니 가을은 눈뜨고
나보다 먼저 와 있는 키 큰 쑥대
밀린 방학숙제로 두근거리던
내 어린 날이
투망에 걸린 채 파닥이고 있었다
불타는 욕망은 수천의 구름집에 빨려가고
물속에서 폈다 쥐는 아이들의 주먹 속에
내 일상이 유예될 때
낯익은 바람 떼 들
하얀 갈밭 사이에서
역장의 통과 신호를 흉내 내고 있었다
이제 옥수수는 옥수수끼리, 잡힌 은어는 은어끼리
어느 것이나 당당하여 유언도 없더라
저문 관촌 들녘에서
산이 산을 부르고 물이 물을 부를 때
나는 끝내 아이들을 부르며
훠이훠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신수현, 입추
아직 덜 식은 몸이 뒤척인다
바람만 스치면 미쳐버리는 불꽃같던 나날
겨우 이겨내고
여민 가슴
그냥 지나 가다오
이상 기류라던가 열대성 저기압이 몰고 오는
눈 먼 바다의 몸부림
이제는 맑게 눈 떠 흔들리지 않을
하늘만 이마 위에 얹고
날개를 달고 싶다
티끌로 남아 떠돌 목숨 위해
타다 남은 몸 엷은 바람의 혀끝으로
김삼환, 거인의 자리
강물이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속 깊은 상처 아물어
생살 돋을 때까지
제 속에 산 그림자를 껴안고 있기 때문이지
바위가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속으로 울음 울어
불길 잡힐 때 까지
거인이 앉았던 자리에 가득한 고요 때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