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눈
눈을 밟는다
눈이 시린 풍경을
꾹꾹 밟는다
그러나 눈은
온전히 밟혀지지 않고
자꾸만 발등 위로
심지어 무릎까지
올라온다
제 존재를
떠올리려 한다
덮어야 할
밟혀야 할 운명을
내 발걸음에 의탁한 채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눈이 떠올라
내 발목을 쥐고
너도 나처럼
떠올라라
떠올라라
머리 위까지
눈이 날린다
윤강로, 들꽃 이름
들꽃 이름 외우기를 그만 두었다
꽃 이름을 외우니
꽃이 사라졌다
숨은 듯 선명하게 고운 들꽃
소리 없이 배시시 웃는 들꽃
발돋움할 줄 모르는 낮은 키의 목숨
들꽃처럼
이름을 지워도 아름다운
그런 사람 어딨니
박선우, 꽃의 파일을 해킹하다
몇 페이지의 텍스트를 저장하고 있는가에
벌은 온몸으로 후각을 동원하고
패스워드를 찾느라 온종일 붕붕거린다
아무래도 대갓집 규수 같은 목단이라면
천개의 비밀을 보유하고 있지 않을까
몇 마일을 날아왔을 벌이 꽃과 접속을 끝내고
꽃의 텍스트를 읽느라 정신이 없다
꽃에게도 이렇게 많은 공개할 수 없는
파일이 있다는 것, 그 파일 속에는
천기를 누설할 수 없는 꽃의 비밀들이
문서화된 텍스트를 읽어내느라
텍스트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안이 궁금해 기다리는 바람
세상이 시끄러울 것 같은 예감으로
제각기 촉각을 세우고 있는 새와 바람
밖이 시끄럽든 말든 벌은
무차별 꽃을 해킹하고 있다
박완호, 풍경을 지운다
검붉게 타던 플라타너스 잎들이
겨우 며칠을 못 넘겨 땅으로 곤두박칠친다
끝에 남은 몇 개의 흔적을
아이들 서넛이, 그 고통과 적막을 달래듯
기어올라 가지를 흔든다 우수수
마른 골격이 드러난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한 시대를 버팅겨 온 힘에 대한
배반이다 풍경이 지워지고
빈 손가락, 구부러진 틈 사이
먼발치로 솟구쳤던 나무와 그 위에 허위로 쌓인
발걸음이 무너진다
나무는 이제 꿈꾸지 않는다
몸통에 배어 있던 소리와 향기가 빠져나가고
뿌리에 스며 있던 희망과 절망이 뽑힌다
지금, 거품의 세월
아이들이 깔깔대며 사라진 뒤, 삶이 그렇게 얼어붙듯
나무들이 서 있다
박명숙, 초저녁
풋잠과 풋잠 사이 핀을 뽑듯, 달이 졌다
치마꼬리 펄럭, 엄마도 지워졌다
지워져, 아무 일 없는 천치 같은 초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