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놈의 친구가 된다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책을 많이 읽어야 할 나로서는. 웃기는 것은 그놈이 읽은 것은 마치 내가 진짜 읽은 것 같은 착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놈은 처음에는 내가 읽어야 할 책들의 목록을 작성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워낙 책을 읽지를 않자 안타까워서 내용을 이야기 해주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나 대신 책 읽어 주는 남자’가 돼 버린 것이었다.
소설 같은 경우엔 그놈이 워낙 세밀하게 줄거리를 설명해 줘서 내가 당장 그 책을 써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내가ㅡ게을러서 꼭 필요한 책도 억지로 읽는 내가 그 책을 다시 읽겠는가.
나는 갈수록 가만히 앉아서 그놈이 읽은 책의 요약만 받아 먹게 되었다. 책과는 거의 담을 쌓아 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글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 공부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등교하면 학교에서 놀고, 하교하면 여자애들을 만나거나 그놈이 있는 화실에 가서 놀았다.
그놈은 낮에는 도서관에서 교과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고, 밤에는 자신의 중학교 선배인 H대 미대를 나온 창주형이 운영하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화실에는 많을 때는 열 명, 적을 때는 다섯 명 정도가 있었다.
처음 가서 인사를 했을 때, 창주형은
“정태가 사랑에 빠진 남자가 생겼다더니 너로구나. 진짜 남자답고 멋있네!”
하면서 반겨주었다. 창주형은 게이 느낌이 나는 가냘픈 남자였다. 목소리도 여자에 가까웠다. 하얀 손에 손가락도 가늘고, 길고, 예뻤다.
나는 봉필이의 친구답게 씩씩하게 말했다.
“행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꺼?”
“그럼. 언니나 누나라 불러도 되구.”
창주형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때부터 나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림을 그리는 줄 알 정도로 화실을 들락거렸다. 그래도 창주형은 나를 좋아했다. 분위기와 예의를 안다는 것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여서 조용조용하게 다녔고, 다른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볼 때도 멀찌감치서 조용하게 구경했다. 그러다 놈이 쉴 때 같이 바깥으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었다.
그림이라곤 하트나 겨우 그리는 것이 전부인 내가 그나마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을 깨우친 것도그때였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도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열정과 노력과 집중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마치 삽시간에 환칠하듯이 그린 것일지라도 그 화가가 그동안 축적한 열정과 노력의 산물인 것이었다.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은 한 가지다. 요래조래, 오래오래 보는 것. 어차피 그린 사람과 똑같은 크기의 열정과, 노력과, 고뇌를 고스란히 느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런 것들을 헤아리면서 봐야 된다는 것이다. 시나 글도 여러 번 읽어야 제대로 가슴으로 들어오듯이.
놈과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좋았다. 특히, 놈이 그림을 잘 그려서 더 좋았다. 그림을 그리는 놈의 옆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림이라고는 정말 못 그리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나는 어떤 카타르시스까지 느꼈다.
평생 ‘그냥 친구’로 지내게 될 정현이도 만났다. 화실에 놀러 다닌지 얼마나 됐을까. 바깥에서 놈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정현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난 최정현!”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도 뭔일인가 싶어 놈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아, 우리, 친구야.”
놈과 중학교 때부터 같이 그림을 그렸던, 지금은 무포여고에 다니는 친구라고 했다. 화실에 출입하던 첫날부터 얼굴은 알았지만 학년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안 그래도 예뻐서 이제나저제나 말을 걸 기회를 노리는 중이기도 했다.
“종내기 니, 생각보다 얌전하다야!”
웃으며 그녀가 하는 말이었다. 여기서 참고 있으면 봉필이의 친구가 아니었다. 이럴 때는 잠시도 망설이면 안되는 것이었다. 여자의 관심을 끄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었다.
“가시나 니가 머 아는데? 주우 차신어뿔라!”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다 알지. 깡패라는 거도 알고, 똥바람쟁이라는 거도 알고.”
“우와, 진짜 미치겠다. 됐고! 내 조용히 쫌 살둘 내비두라!”
“내가 왜 이러냐 하면, 내 예쁘다고 찝쩍거릴 생각하지 말라고 미리 경고하는 거야. 폼을 보니 니가 여기 자주 올 거 같애서 말이야.”
“예쁜 가시나들 전부 월북했나, 가시나야? 니 긑은 가시나는 뻐스로 한 차 갖다조도 뻐스만 뺏어가꼬 토낄 꺼거덩!”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정말 예뻤다. 그런 일만 없었어도, 아니 그런 일이 있었어도 나는 여러 번 그녀에게 집적댔지만 철저하게 방어막을 치고 있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인가 나는 결국 그녀에게 항복선언을 하고 말았다. 휴전선이 철통 같으면 아무리 발싸심을 해도 꼬시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우리는 완전한 친구가 되었다. 나중에 놈과 나는 그녀의 결혼식에도 당연히 참석했으며, 그놈이 길 떠나기 전에는 그녀는 빼고 그녀의 부군하고만 술을 마신 적도 여러 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