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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하, 어둠에 들다
어둠이 오기 전
숲 앞에서 시간은 잠시 잠깐
움찔한다
쌓인 빛을 털어내려는 듯
풀들마다 허리께를 한번
요동친다
어둠은 세상의 길을 풀어버리고
소리 속으로 귀를 묻는다
내가 밟고 가는 걸음에 놀라 화들짝
깨어나는 숲
제 울음을 골똘히 들여다보는 벌레들
어둠 속에서 땅은
나에게 순순히 길을 내어준다
어둠에 나를 묻자
길은 훤히 트였다
숲을 빠져나올 즈음
어둠은 겹겹 짜인 시간의 조롱을 흔들었다
눈 익어 오리나무 둥치도
어둠 속 희게 빛난다
작은 도랑을 건너
물은 흘러갈 만큼 가서야 소리를 죽인다
어둠도 깊어질 만큼 깊어야 또 빛이 된다
강경호, 건망증
바람이 불자 상수리나무가
아나 먹어라
툭, 상수리 몇 개를 떨어뜨리자
다람쥐 한 마리
한참 동안 맛있게 식사하고
몇 개를 입에 물고 언덕 위로 올라가더니
나뭇잎 속에 재빨리 숨긴다
눈이 내린 날
먹을 것이 궁한 다람쥐
언덕 위 눈밭을 뒤지다 그만둔다
저토록 앙증맞은 것이
숨겨놓은 식량을 찾지 못하다니
쯧쯧, 어린것이 벌써 건망증이라니
사람인 나도
나이 들수록 기억력이 없어지는데
책을 읽다가 책장을 넘기면
앞장이 생각나지 않고
아내는 벌써 솥을 몇 번이나 태워먹고
팔순의 어머니는 손에 들고도 찾으신다
사람의 건망증은
사람 구실을 못하게 하는데
다람쥐의 건망증은
언덕을 푸르게 한다
박현령, 나는 후유증을 앓고 있다
밤마다 내 귀엔
소리가 들린다
젊음이 지나가는 소리
공평하게
참으로 한 사람도 빼지 않고
공평하게
세월이 지나가는 소리
젊음을 엎고
세월에 등 떠밀려
서서히
변함없이 지나가는
세월의 소리
나는 그냥 듣지 않고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그래서인지
밤마다 내 귀엔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박시교, 더불어 꽃
얼만큼 황홀해야 갇혔다 하겠느냐
이미 나는 네 안에서 봄날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피어나는 가쁜 숨결일 뿐인 것을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이만하면 꽃이다
전건호, 때늦은 후회
지금도 가슴 시린 것은
내일이면 또 만날 것으로 알고
손 한 번 못 흔들고 헤어진 사람
다시 찾을 줄 알고
낙서 한 줄 못 남기고 떠나온 담벼락이다
붉어진 얼굴로 나마
고백이라도 해보았으면
붙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사람
세월 지나 낯선 거리
사내 아이 손잡고 지나치는
뒷모습도 황망하지만
지나온 길모퉁이마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며 고백하지 못한
까맣게 많은 말들 무서리에 덮이고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
처마 밑 제비 되어 찾아와
여름내 흙집 짓고 울다 떠난 인연 아닌 인연을
화들짝 깨닫고 바라보는 빈 제비집
삭풍에 기타줄처럼 떠는 거미줄
그 어수선한 공명에
때늦은 후회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