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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록, 갈대꽃
하늘을 자꾸 올려다보니께
하늘 좀 그만 쳐다보라고 허리가 꼬부라지는 거여
하느님도 주름살 보기가 민망할 거 아니냐
요즘엔 양말이 핑핑 돌아가야
고무줄 팽팽한 놈으로 몇 족 사와야겄다
양말 바닥이 발등에 올라타서는
반들반들 하늘을 우러른다는 건
세상길 그만 하직하고 하늘 길 걸으란 뜻 아니겄냐
갈 때 되면, 입 꼬리에도 발바닥에도
저승길인 양 갈대꽃이 허옇게 피야
박용하, 낮 그림자
내 맘대로 안 되고
내 뜻대로 안 된다
그건 서글픈 일
조금 고요한 일
내 그림자조차
내 맘대로 안 된다
그건 서러운 일
조금 호젓한 일
도대체 내 몸대로
할 수 있는 게 뭐람
비빌 언덕이
자기 자신밖에 없고
나하고 놀 사람이
나밖에 없는 사람
그건 쓸쓸한 일
조금 꿈같은 일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내가 손볼 수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다
그것조차 쉽지 않다
나는 나한테도
수없이 당한 사람이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정숙자, 무인도
서푼짜리 친구로 있어줄게
서푼짜리 한 친구로서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거리에 서 있어줄게
동글동글 수너리진 잎새 사이로
가끔은 삐친 꽃도 보여줄게
유리창 밖 후박나무
그 투박한 층층 그늘에
까지 소리도 양떼구름도 가시 돋친 풋별들도
바구니껏 멍석껏 널어놓을게
눈보라 사나운 날도
넉 섬 닷 섬 햇살 긴 웃음
껄껄거리며 서 있어줄게
지금 이 시간이 내 생애에 가장 젊은 날
아껴아껴 살아도 금세 타 내릴
우리는 가녀린 촛불
서푼짜리 한 친구로
멀리 혹은 가까이서 나부껴줄게
산이라도 뿌리 깊은 산
태평양이 밀려와도 끄떡없는 산
맑고 깨끗하고 때로는 외로움 많은
너에게 무인도로 서 있어줄게
공재동, 초록 풀물
풀밭에서
무심코
풀을 깔고 앉았다
바지에
배인
초록 풀물
초록 풀물은
풀들의
피다
빨아도 지지 않는
풀들의
아픔
오늘은
온종일
가슴이 아프다
정희경, 도마뱀으로 살아가렴
귓바퀴에 묻어 두었던 은어들이
새벽녘 호숫가에 번지던 물안개가
솟아오르는 태양에 자취를 감추듯
소속감을 상실한 채 떠돌아다닌다
진실의 무게를 가벼움에 두고
허공에 흩어지는 구름의 흔적처럼
사랑쯤 아무렇지 않게 뚝 떼어놓고 달아나는
도마뱀으로 살아가렴
어둡고 칙칙한 곳에 배를 깔고 누워
눈만 굴리고 있을
아픔의 감각도 상실한 채
약속의 무게를 잃어버린 넌
도마뱀으로 살아가렴
남들이 밟지 않은 좁은 통로를
꼬리도 없이 눈치 빠르게 빠져 다니며
세상에서 눈 돌린 어두운 곳에서
바위의 무게를 등에 느끼며
고독의 무게를 가슴에 담고
도마뱀으로 살아가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