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는 반성문마 보머 절때로 다시는 교무실에 안 올 놈인데 사흘이 멀다꼬 오니 이거 세계9대 불가사의 아이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반성문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내 멋진 친구 박봉필이었다.
어떤 죄목(?)이라도 봉필이의 반성문은 항상 이랬다.
‘샘요, 죽을 죄를 졌니더. 함마 용서해 주이소.’
다시 쓰라고 몽둥이가 엉덩이에 아무리 깊이 파고들어도 봉필이는 글자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써서 다시 제출했다. 마치 고난 앞에서도 자신의 작품에 책임지려는 투철한 예술혼으로 무장한 혁명적 전위예술가 같았다. 어쩌면 맞는 것을 즐기는 것도 같았다.
처음에 봉필이는 참 많이도 맞았다. 엉덩이가 엉덩이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반항하는 것도 아니었다. 묵묵히 맞고 있을 뿐이었다. 결코 아픈 표정도 짓지 않았다. 머리를 혹사시키느니 엉덩이를 혹사시키고 말겠다는 것이 봉필이의 굳은 신념이었다.
봉필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독한 선샘이라도 몇 번만 제대로 맞아 주면, 몇 번만 견디면 손을 들고 만다는 것을. 그렇게 봉필이는 선샘들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꼴통 중의 꼴통이란 것을. 나중에는 반성문을 무슨 작품처럼 쓴 나와 마찬가지로 봉필이의 반성문도 퇴짜 없이 한번에 무사통과였다. 은근과 끈기의 승리였다.
지금도 그 시절의 봉필이를 생각하면 참혹한 고문을 견뎌내고, 마침내 고문을 즐겨 버리기까지 하므로써 적들을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한 남자(A man)’의 주인공ㅡ저자인 세계 최고의 저널리스트 오리아나 팔라치의 연인이자 남편인 그리스의 위대한 혁명가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가 떠오른다. 봉필이도 혁명가가 됐다면 그깟 고문 쯤은 즐겨버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그 봉필이는 무사히 졸업을 했고, 제 표현으로는 내가 백수로서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을 때 ‘밑바닥부터 빡빡 기어서’ 사업에 크게 성공했으며, 지금도 멋지게 살고 있다.
ㅡ뽕필아, 우리 와 곽제 이래 늙었노? 우리 인자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가?
옛날 생각이 나서 문자를 보내면 5초도 안돼서 전화가 온다.
“이 시봉넘이 공 치고 있는데 와 문자질은 해쌓고 지랄이고? 보고 싶으머 나오머 되지, 시봉넘아! 조까튼 소리하지 말고 온나, 시봉넘아! 가시나들 ㅇㅇㅇ ㅇ ㅇㅇㅇㅇ 가자, 시봉넘아! 바쁘다 끊어라, 공 쳐야 된다, 시봉넘아!”
여자들도 끼워서 라운딩 중인지 전화로 듣는 내가 다 민망하건만 까르르르 자지러지는 소리.
나는 속으로 말한다. 그래 뽕필아, 말이라도 고맙다.
그러나 내 멋진 친구 봉필이ㅡ그놈은 ‘낭만이 대문호 만들기’ 후원회장이기도 하다ㅡ 때문에 외로움이 왈칵 밀려온다. 아!
그렇다. 반성문깨나 써 본 소싯적 내 친구들은 세계가 나를 대문호로 추앙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전재산을 털어서 내 책을 사재기는 할지언정 결코 내 책을 읽어 보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나의 비애다. 그넘들은 글자를 너무나 숭배하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책은 너무나 거룩해서 가까이 접근하는 것마저 불경스럽다고 생각하는 그런 넘들이었다. 그런 넘들이 책장을 어떻게 넘기겠는가.
이럴 때면 더욱 생각나는 한 놈이 있다. 정태. 그놈은 뭐가 그렇게 바빠서 나에게 말 한 마디 없이 떠나고 말았을까. 또, 슬픔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