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수, 단지(斷指)
간밤에 못물이 얼어붙고 말 것을
너는 미리 알고 있었던 거다
못물 속에 잠긴 버들가지
손가락 하나가
얼음 속에 끼여 있다
피 한 방울 통하지 않도록
옴짝달짝 못하게 꽉 죄여 있다
손가락이 반쯤 달아나다 만
버드나무, 허연
속살을 드러낸 생가지
뭉툭해진 끝에서
뚝, 뚝, 노을이 진다
내일 모레면 입춘, 얼어터진
땅이 그걸 받아먹고 있다
심보선, 도시적 고독에 관한 가설
고양이 한 마리
도로 위에 낙엽처럼 누워있다
몸통이 네모나고 다리가 둥글게 말린
코끼리 같은 버스가
죽은 고양이 앞에 애도하듯 멈춰있다
누군가 말한다
스키드 마크는
바퀴도 번민한다는 뜻이지
누군가 답한다
종점에서 바퀴는 울음을 터뜨릴 거야
새 시장은 계몽된 도시를 꿈꾸지만
시민들은 고독하고 또한 고독하다
했던 말을 자꾸 되풀이하는 것이 그 증거다
멀리서 아련히 사이렌이 울린다
한때 그것은 독재자가 돋우는 공포의 심지였으나
이제는 맹인을 이끄는 치자꽃 향기처럼 서글프다
누군가 말한다
두고 봐
종점에서 바퀴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거야
하루 또 하루
시민들은 고독하고 또한 고독하다
친구들과 죽은 자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이 그 증거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고양이 한 마리 또 한 마리
김수복, 고목 한 그루
가을바람 속에 내 마음은 텅 비어 있다
나는 헐렁거리는 자루다
욕망이 자꾸 불거져 튀어나오고 싶어하지만
가을바람은 헐렁거리는 자루를 끌고 간다
자루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자루 속에서 못들이 솟아 나온다
마음은 녹아서 가을 볕 속으로 난
저문 황톳길을 가고 있다
이재훈, 카프카 독서실
벽이다
엎드려 잘 때마다 이곳은
바닥이 아니라 무른 껍질이라 생각했다
배에 힘을 주면 지그시 열릴 것 같은
그 껍질을 깨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몸을 마음껏
비벼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주장해야 했다
쿵, 말문이 열리면 긴 오솔길이 펼쳐지곤 했다
한참을 걸었을 때 울창한 숲이 보였다
나는 구름을 먹고
신성한 사랑에 대해 논했다
풀숲에는 소리가 고여 있었다
풀을 헤치니 소리가 서로 밥을 먹고 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나무의 텅 빈 몸에 구름을 토했다
검은 말들이 꿈틀댔다
가련한 밤
문신을 새기는 꿈을 꾸었다
팔뚝 위에 피리를 새겨 넣자
내 몸에서 노래가 흘러 나왔다
창밖엔 십자가가 흐른다
가로등이 떠다닌다
감정 없이 장단만 있는 노래
이 방은 어둠이 몸 푸는 자리
얼굴도 없고 가슴도 없다
빗방울도 없이
빗소리가 내리는 방
엎드려 자고 있으면
살포시 몸에 감기는
빈 말들의 뼈
김경인, 산책하는 사람
나는 계속 같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지루한 이야기를 위해 백년간 돌아가는 물레처럼
잠을 깨면 내게 매달린 너무 많은 창문
커다란 자석에 이끌리지 않기 위해 뒷걸음치는
아주 작은 쇳가루처럼
나는 나로부터 가장 먼 창문
먼 곳에서 더 먼 곳까지
재로 만든 도시와
이름 없는 개들의 식탁에서 내가 돌아오는 동안
길은 손가락을 활짝 펼치듯
다섯 여섯 그리고 아홉 개의 가장 빛나는 날개털을 보여주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탕아처럼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간다
불 꺼진 집들이 창문을 매달고 각자의 비밀을 향해 날아오르고
나는 나에게 남은 아흔 아홉 개의 털실
돌아오다 실수로 흙탕에 떨어진 한 올
다만 여기에 남아
조금도 깨지지 않은
완벽한 유리의 세계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