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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pvZSiQXHL_E
김안, 동지(冬蜘)
밤이고
밤이면 길바닥마다 거미가 집을 짓는 계절이다
나는 쭈그려 앉아 투명한 거미집을 부순다
양손 가득 찢겨진 거미집을 묻힌 채
얼굴을 감싸면 달이 떠오르는 소리 들린다
타원형의 긴긴 달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아이들이 가슴팍에 부엌칼을 숨긴 채
숨 가삐 언덕 위로 뛰어올라가는 계절이다
머리에서 달을 닮은 뿔이 자라나고
술에 취한 가난한 아비들이 밤마다 거미집에 걸려 전화하는 계절이다
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아비들의 목소리가 해가 뜨고 나서야 시반(屍班)처럼 퍼지는 계절이다
손가락 끝으로 거미의 배를 누른다
거미는 몽당연필처럼 작아지고
손가락 끝이 파랗게 언다
손가락이 솜사탕보다 맛나던 계절이다
자꾸만 손가락이 없어지던 계절이다
온종일 방이 없는 집에 웅크려 있던 사람들도
慙愧하며 구름을 생산하는 계절이다
최서진, 거울 속으로 사라진 나비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나비처럼, 거울 밖에서 나는 두렵다
암호 같은 바깥에서 모서리를 버린다
대부분의 모서리는 자기 자신 되기
자신을 버린 나는 거울 뒤에 숨는다
이곳은 비극적인 세계
거울 밖에서 거울 속을 앓는 밤
신탁처럼 도착한 편지를 읽고
상실의 자세로 하루를 견딘다
극적으로 성장하는 허공들
혁명의 나비는 다시 날지 않는다는 전언을 듣고
위태로운 허공은 깊이를 배운다
거울의 안과 밖
우리는 난해한 경계에서 단정하고 냉정하다
나비는 거울 속에서 기적처럼 날 수 있을까
맨손으로 거울을 만지면 손가락이 베이는
절단의 벽, 수락해주지 않는 거울의 내부로 잘린
손가락이 툭 떨어진다
나비와 손가락을 남기고 뒤돌아서는 저녁마다
잘린 손가락 마디에서 모서리가 한 뼘씩 자란다
서덕민, 월식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슬프다
눈과 코와 입과 표정이 없다 해도
오랫동안 누군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내 상대의 그림자가 얼굴에 묻어나기 시작한다
어떤 얼굴은 지구의 그림자보다 크고 짙은 슬픔으로
그대의 얼굴을 잠식해나갈 것이고
밤하늘에 선명하게 파인 달의 궤도라도 지울 것처럼
그대의 익숙한 길을 어둠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는 어김없이 자신의 어둠을 달에 던져준다
이 땅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본다는 것
그것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그림자 속을 지나며
밤하늘의 모든 별 빛나게 할 만큼
밀도 있는 어둠을 만드는 일 아닌가
그렇게 따듯하고 밝은 그대의 어둠을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 다시 드리우는 일 아닌가
지구의 그림자 속을 드나드는
고집스레 파인 달의 궤도가 눈물로 가득 차 있다 해도
우리가 지나야 할 길은 어차피
누군가가 뿌린 눈물로 이미 눅눅해진 길 아닌가
이장욱, 기념일
식도에서 소장까지
기념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우리는 꼭꼭 씹어먹는다
위를 기념하고
쓸개를 기념하고
무엇이든 녹이는 침을 기념하고
오늘은 누군가의 기일이며
전쟁이 있었던 날
창밖의 구름은 지난해의 농담을 닮았고
농담에는 피가 부족하다
어제까지 어머니였던 이가
오늘은 생물이라고 할 수 없고
아이는 하루종일 거짓말에만 흥미를 느끼고
식물들의 인내심은 놀라워
이빨을 드러낼 수 있는 것들에게는 반드시
식도가 있고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지구의 공전이 계속되자
지난해의 농담들이 사라졌다
흰 떡 위에 수많은 이빨들이 돋아나고
우리는 무엇이든 꼭꼭 씹어먹고
모두들 별의 속도를
천천히 이해했다
이수명, 줄넘기
줄넘기를 하고 있다
지면을 넘기며
지면 위에 선다
발아래 지면이 팽창될수록
망각이 깊어져
다른 페이지 속으로 섞여 들어간 거짓말들처럼 두 발은 부드럽게 흩어질 뿐
들러붙은 손
하나 둘 셋 심장을 후려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지금 보이지 않는 폭음을 들어 올리는 자는 누구인가
폭음은 어디로 가는가
줄넘기를 하고 있다
줄 속에 들어가
구부러지는 줄
망각이 깊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