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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철, 늦은 봄날
간장 항아리 위에
둥근 하늘이 내려오고
매지구름 한 장
떴다가
지나가듯이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가끔은 내 생각도 하는지
늦은 봄날 저녁
머언 그대의 집 유리창에
슬며시 얹히는 놀빛
모닥불로 피었다가
스러지듯이
김혜순, 잘 익은 사과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 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이원규, 꽃의 속도
덧나는 상처도 없이
어찌 봄이랴
섬진마을의 매화가
지기도 전에
젊은 황어떼가 지리산에 오르고
잠시 산수유꽃이
잉잉거리는가 싶더니
화개동천의 십 리 벚꽃도
파장
아무래도
봄은 속도전이다
피고 지는 꽃이 그러하고
어이쿠
무릎 한 번 치시더니
앉은 채
입적하신 노스님이 그러하니
나는 그저 어지러워
눈 코 입 귀를 틀어막을 뿐
만 마디
척추 속에 차오를
늦은 고로쇠 수액을 기다릴 뿐
장승리, 말
정확하게 말하고 싶었어
했던 말을 또 했어
채찍질
채찍질
꿈쩍 않는 말
말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니체는 울었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두 개의 혓바닥
하나는 울며
하나는 내리치며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었어
부족한 알몸이 부끄러웠어
안을까 봐
안길까 봐
했던 말을 또 했어
꿈쩍 않는 말발굽 소리
정확한 죽음은
불가능한 선물 같았어
혓바닥에서 혓바닥이 벗겨졌어
잘못했어
잘못했어
두 개의 혓바닥을 비벼가며
누구에게 잘못을 빌어야 하나
오세영, 그릇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