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h_nkv7xYbGI
이재무, 옥수수
열병식 하는 병사들처럼 밭두둑
줄지어 서서 어느 날은 햇빛의 폭우에
어깨 축 늘어뜨리고 어느 날은 폭풍으로
땅에 닿을 듯 사지 휘어져 흔들어대다가도
달 푸른 밤이면 쫑긋, 둥근 잎사귀 열어
하늘의 말 경청하는 옥수수들 보고 있자면
나의 미래 불쑥 얼굴을 내밀어 올 것도 같다
한 여름 달아오른 지열의 적막 속에서
촘촘하게 박혀서는 누렇게 익어가는
옥수수 알들의 묵언을 나는 새겨 읽는 것이다
전윤호, 내가 고향이다
추석에 집에 있기로 했다
친정이 없어진 아내와
서울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올 명절은
집에서 쉴 거라 했다
시장에서 송편을 사고
보름달이 뜨면
옥상에서 구경하자고 했다
용돈을 받은 아이들은
신이 나서 컴퓨터 게임을 사고
인터넷으로 떠난다
괜히 적적한 척
서울에 있을 선배에게 전화해
그날 저녁 만나기로 했다
문을 닫고 돌아누운 어두운 거리에도
작은 수족관에 불을 켜고
물방울 같은 사람들을 기다리며
문 여는 술집이 있을 거라고
텅 빈 시내버스처럼
반겨줄 사람이 없는
성묘객이 끊어진 무덤처럼
내가 고향이다
조동례, 사랑에 먹히다
칠월 땡볕 까마중 그늘에
사마귀를 먹고 있는 사마귀 한 마리
뜨거운 사랑 뒤처리를 하고 있다
은근히 장난기가 발동하여
먹다만 몸통을 슬그머니 건들자
남은 사랑 물고
어두운 곳을 찾아 필사적이다
먹히고 싶다는 말, 저런 거다
사랑한다 나랑 살자 그런
흔해 빠진 말에 먹히지 않고
물러설 곳 두지 않고 목숨부터 맡기는 것
신철규, 권총과 장미
포개놓은 접시처럼 단단하면서도 위태로운 장미의 꽃잎
손가락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겨누었는데
폭격이 시작된다
봄은 전방위적으로 와서 무작위로 쓸려내려 간다
세계는 피의 정원
권총을 장미로 장식한다고 해서 총구에서 꽃이 피는 것은 아니다
총구를 손가락으로 막는다고 해도
심장과 총구의 거리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장미 꽃다발에서 권총을 꺼내 누군가의 심장을 겨누는 시절은 갔다
표적도 없이 밤의 아가리에 실탄을 쏘아댈 때
총구에서 붉고 노란 장미가 피어났다
달아오른 총구는 오랫동안 식지 않았다
덜덜거리는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고 잠이 들었다
권총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겨누고 널 사랑해
두 손으로 장미꽃을 바치며 널 사랑해
당신의 얼굴은 월면(月面)처럼 울퉁불퉁하고 어둡다
우리는 서로의 눈이 아니라 발밑을 보며 춤을 추고 있었지
권총을 들고 우는 사람
자신의 발끝을 보면서 맹수의 송곳니 같은 방아쇠를 손가락으로 당긴다
심장이 멈출 때까지
관자놀이에서 쿨럭거리며 장미가 피어난다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는 눈꺼풀처럼 장미는 시들고
검게 타들어간다
봄의 야윈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다
이수익, 다락방
혼자만의 공기를 쉼 없이 들이킬 수
있는, 마디마디 뼛속을 깨끗하게 비울 수
있는, 타인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바로 그런 곳
그런 자리
그런 분위기
속으로
나를 눕히고 싶어
아무도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텅 빈 고요만이 물결치는 숨겨진 조그만 방
그 다락방의 은밀한 초대에
가득히 누워
온전하게 나는
새로워지고 싶어
떠오르는 비행기처럼 나는 훨훨 날아갈 거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행복한 사탕을 오래오래
빨면서, 머나먼 우주의 끝을 따라 날 거야
다락방, 언제라도 나를
눕히고 싶은
환상의 그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