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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학,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수로(水路)를 따라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주네
결코 눈 뜨지 말라
지금 한쪽마저 봉인 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 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 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을 만질 때
나는 새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양윤식, 가을에 보내는 편지
누이야, 이제야 내 집을 허물고
서까래를 태운다 얼핏 되돌아보면
한 번도 내 집이 아닌 것 같은
그저 숱한 바람과 날개들의 묘비명
캄캄한 날들을 탱탱하게 버텨주던 말씀들은
언뜻언뜻 꽃잎같은 침묵을 깨트리고
낯설지 않은 신음으로 뛰쳐나온다
누이야, 지금 내가 내 집을 태우는 것은
저 끝도 없는 하늘 공중에
나를 파종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한 걸음
또 한 걸음 불꽃을 안고
하지만, 어쩌면 좋으냐 누이야
종소리처럼 떠나지 못하는 내 발자국들은
아무리 태워도 태워지지 않으니
누이야, 부끄럽구나
정말 부끄럽구나 오늘 밤엔 꼭
어둠을 곱게 빗질하는 별빛에 허물어지는
맑은 귀뚜라미울음, 따라가 보련다
문태준, 산 그림자와 나비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왕성해지는
산 그림자의 내면을 나비가 폴락폴락 날고 있습니다
얇고 하얀 낱장을 넘깁니다
산은 창문 너비의 검은 커튼을 치고
나비는 쪽창 같은 하얀 깨꽃에 날개를 세워 접고 앉고
눈초리에
시린
모색(暮色)
조동례,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이 칼에 베인 날
사랑노래 끝나기도 전에
이별노래 판치는 노래방에서
나는 사랑노래에도 아파서 울고
이별노래에도 아파서 울었다
걸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사랑과 이별이 차고 이우느라
상처는 배경이 드러나지 않는 꽃이다
다가가도 아프고 다가와도 아픈 꽃
가만히 있는 너를 잘못 건드렸다 생아
달을 가리키던 손가락이 칼에 베여도
어둠을 배경으로 별이 뜨고
별을 배경으로 달은 살아 있더라
박영석, 둥글다는 것
전지되어 뭉툭한 사과나무에는 둥근 달이나 열려라
둥근 것은 얼마나 환하냐고
모서리를 버린 것들은 이렇게 환하다고
둥그렇게, 둥그렇게 열려라
웅크리고 앉아 먼 산 보는 노인의 등 같은 오랜 둥긂
보라 둥근 것은 얼마나 먼가
나무 아래 누워 나무로 돌아가고 있는 사과를 보면 알리라
껍질에서 씨방까지가 얼마나 먼지
씨방에서 씨앗까지는 또 얼마나 아득한지
그 모든 것들의 저녁은 얼마나 느리게 둥글리는지
둥글리면서 흐르는 개울물소리는 얼마나 쓸쓸한지
들판을 건너오는 저녁소의 울음소리
젖은 자갈돌이 몸 뒤집는 소리
파도가 붉은 해안선을 핥는 소리
목이 긴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가는 소리는
얼마나 멀고 둥그런지
발끝에 달빛을 매달고 동굴을 기어 나오는
등딱지가 검은 게의 연대기처럼
저기, 지층과 지층사이를 날아가는 새들의 둥근 길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