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경주 남산
봄날에 맹인 노인들이
경주 남산을 오른다
죽기 전에
감실 부처님을 꼭 한번 보고 죽어야 한다면서
지팡이를 짚고 남산에 올라
안으로 안으로 바위를 깎아 만든 감실 안에
말없이 앉아 있는 부처님을 바라본다
땀이 흐른다
허리춤에 찬 면수건을 꺼내 목을 닦는다
산새처럼 오순도순 앉아 있다가
며느리가 싸준 김밥을 나누어 먹는다
감실 부처님은 방긋이 웃기만 할 뿐 말이 없다
맹인들도 아무 말이 없다
해가 지기 전
서둘러 내려오는 길에
일행 중 가장 나이 많은 맹인 노인이
그 부처님 참 잘생겼다 하고는
캔사이다를 마실 뿐
다들 말이 없다
최영철, 햇살의 내력
햇살이 내 온몸을 간질이고 있다
좋아 죽겠다는 듯 죽고 못 살겠다는 듯
내 마음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지
첫 손길인 듯 아무도 만지지 않은 섬섬옥수인 듯
천사의 날개부터 시궁창 터럭까지
보이는 것마다 입술을 댄 바람둥이
몇 번 앞길이 막혀 곤죽이 되기도 한 몸뚱이
단단한 방어벽으로 얼씬 못하게 막아도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햇살은 핥고 있다
이제 그만 딴 데나 가보라고 돌아누워도
날름 또 혀를 내민다 순정보다 보드랍게
눈물 난다 땀 난다 눈부셔 웃음 난다
아직도 너는 하늘의 하수인 하늘의 비눗방울 하늘의 재채기
나는 알고 있다 해라는 놈이 얼마나 큰 바람둥이인지
거짓말쟁이인지 사기꾼인지
제 살을 쪼개 수없이 나누어준 수억년 부스럼 딱지
하늘을 배경으로 펼친 속임수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남김없이 다 거두어간
수수억년 전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된
천부적 바람둥이의 무한대 농담
이수광, 도중(途中)
안유영인무(岸柳迎人舞)
임앵화객음(林鶯和客吟)
우청산활태(雨晴山活態)
풍난초생심(風暖草生心)
경입시중화(景入詩中畵)
천명보외금(泉鳴譜外琴)
노장행부진(路長行不盡)
서일파요잠(西日破遙岑)
기슭의 버들은 사람을 맞아 춤을 추고
숲속의 꾀꼬리는 나그네의 읖조림에 화답하네
비가 개이니 산의 모습이 생생히 살아나고
바람이 따뜻하니 수풀이 절로 돋아나오네
풍경은 시 속에 든 그림과 같고
샘물 소리는 악보 밖에서 울리는 거문고 소리로다
길은 멀어서 가도가도 끝이 없는데
지는 해는 먼 산 경계를 찢는구나
정현종, 시인
아직도 일기장 같은 거
학원일기나 희망일기 같은 걸
사랑하며 망쳐 놓으며
심장은 없고 바람뿐이며
재산은 수상한 피와 광기뿐이며
본능에 생각을 싣고
감각에 정신을 싣고
꿈을 적재하는 무역이 있으며
의사와 업을 가장 미워하고
독자를 가장 미워하고
십자가를 자로 사용하다 들키고
죽음이 던지는 미끼에 매어달려 쩔쩔매고
망측한 기쁨에 빠져서 부르짖고
사물을 캄캄한 죽음으로부터 건져내면서
거듭 죽고
즐거울 때까지 즐거워하고
슬플 때까지 슬퍼하고
무모하기도 하여라
모든 즐거움을 완성하려 하고
모든 슬픔을 완성하려 하고
시대의 소리에 자갈을 물리는 강도를 쫓아 밤새도록 달리고 있다
김주완, 돌부리
뾰족이 내민 돌부리는
사방을 향해 적의를 내뿜고 있다
누구든 와서 그에게 걸리면
살기 띈 눈을 치뜨고
순식간에 상대방을 쓰러뜨린다
얼굴이나 팔꿈치 혹은 무르팍
어디든 가리지 않고 생채기를 낸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일순에 무너지는 황당한 몰락
그러나 돌부리는 멀쩡하다
놈의 뿌리가
굳건하게 땅속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돌부리를 지켜주는
돌의 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