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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시간의 방목장
3시, 7시, 2시 15분
누가 이곳에 시간을 방목했을까
시간의 바깥이 고요하다
자유로운 저 세상 밖의 시간들
왜 늦었느냐고 닦달하는 사람도 없다
각기 보폭이 다른 침묵들, 낮과 밤이 뒤섞인
시침과 분침을 껴입은 무질서가 평화롭다
일생 이렇게 편한 때가 있었나
어제와 내일도 까맣게 잊고
종일 잠만 자도 좋은 시절은 세상을 알기도 전에 끝이 났다
횡단보도 앞
속도들이 다리를 뻗고 누웠다
고장 난 신호등에 길이 막혀도 태연한 대명시계점
저 묵언(默言)을 깨워 값을 지불하는 순간
끝없는 동그라미에 갇혀
죽을 때까지 고된 노역(勞役)을 치러야한다
소리에 귀가 늙은 사내가
시계를 팔뚝에 묶는 순간, 시간의 노예가 태어났다
세 개의 바늘이 놓친 걸음 허겁지겁 따라간다
송재학, 개구리밥
초록이 밀사를 보냈다네
그 왕국은 아직 선포되지 않았지
며칠 전 이 늪은 고요하기만 했었네
지금 초록은 물에 비치는 푸르름만으로
한껏 울지 못하겠다고
마침내 밀사를 보내
수면에 제 왕국의 흥망을 빽빽하게 펼쳤네
수많은 초록이 물 위에 누워 한껏 게을러졌다네
이것을 개구리밥이라고만 부르지 말라
수줍음처럼, 또렷하게 작은 꽃이 핀다네
그들이 초여름의 날랜 병정들이라네
길상호, 밥그릇 식구
처마 밑에 놓인 밥그릇
아침엔 까치가 기웃대더니
콩새도 콩콩 깨금발로 다가와
재빨리 한 입,
빗방울이 먹다 간 한쪽은
텅텅 불어 못 먹을 것 같은데
햇살이 더운 혓바닥으로 쓰윽
저마다 배를 불린다
정작 그릇 주인인 고양이는
잠을 자다 뒤늦게 나와
구석에 남은 몇 알로
공복을 누르지 못해 야아옹
뒷마당으로 사라지고
고양이가 흘리고 간 한 알
개미들이 기다랗게 줄을
텃밭에서 돌아온 할아버지
텅 빈 밥그릇을 보고 허허
또 한 그릇 덜어낸 사료 포대처럼
조금 더 허리가 휜다
권자미, 괜찮아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은
괜찮지 않다는 말이에요
세상에 괜찮은 게 있던가요
세상에 괜찮은 건 없어요
우리는 괜찮지 않을 때
놀란 얼굴로, 괜찮아?
묻곤 하지요
괜찮지 않아도
아프지나 말자고
떠나는 당신 등에 대고
나는 말해요, 괜찮아요
나를 향해서도 말해요, 괜찮아
괜찮아요
그런 줄 알지만 다 알지만
왼쪽 귀를 대봐요
당신도 괜찮지요
하면서도 괜찮지 않았으면 해요
안도현,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내리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