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길 잃은 것들
비 오는 날
대문 앞에
강아지 한 마리
쫓아도
가지 않고
발발 떨고 앉았다
젖은 털을
탈탈 털면서도
자꾸 나만 본다
주인 찾아 가라고
두고 문 닫으려니
너무 가여워
길 잃은 것들은
다 불쌍해
길 찾아갈 동안은
김영재, 절벽
우리 앞을 가로막는
절벽은 있어야겠다
사정없이 후려치는
바람에게 뺨 맞고
쓰러져
기댈 수 있는
막막함 있어야겠다
박두규, 저녁 강
어두워지는 하루의 끝자락에 앉아
서서히 빛을 발하는 강줄기를 본다
별들은 강둑에 숨어 어둠을 기다리고
강에는 어김없이 물고기들이 뛰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들이 뛰는 이유를 모른다
그랬지. 이유 따위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
누군가가 떠나면 떠나는 것일 뿐이지
그렇게 어둠은 서서히 두텁나루에 닿았다
이제 강을 건너려는 일은 그만두고
강을 바라보는 일에 열중하리라
바람이 부는 일이나 어둠이 내리는 일이나
또는 아침이 오는 것처럼
늘 그렇게 저절로 그러하듯이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에 힘쓰리라
하나 둘 켜지는 먼 마을의 불빛들
차분하게 어둠을 맞이하는 이런 저녁처럼
이제 강을 건너려 하기 보다는
강을 바라보는 일에 열중하리라
장옥관, 춤
흰 비닐봉지 하나
담벼락에 달라붙어 춤을 추고 있다
죽었는가 하면 살아나고
떠올랐는가 싶으면 가라앉는다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림자가 따로
춤추는 것 같다
제 그림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그것이
지금 춤추고 있다
죽도록 얻어맞고 엎어져 있다가
히히 고개 드는 바보
허공에 힘껏 내지르는 발길질 같다
저 혼자서는 저를 드러낼 수 없는
공기가 춤을 추는 것이다
소리가 있어야 드러내는 한숨처럼
돌이 있어야 물살을 만드는 시냇물처럼
몸 없는 것들이 서로 기대어
춤추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나를 할퀴는
사랑이여 불안이여
오, 내 머릿속
헛것의 춤
김수복, 달의 눈빛을 보았다
배가 배 위에 떠 있다 몸이
출렁일 때마다 가라앉았다가 떠오른다
허공이다
다시 배가 배 위로 올라간다
해를 배 위로 올려놓는 바다
죽음이 끓어 넘치는 바다
해가 죽어서 배 위에서 내려온다
기뻐서 죽겠다는 듯이 깊이 가라앉아
벌겋게 달아오른 달의 눈빛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