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4igF5wAa1w0
고영민, 갈대
어머니가 개밥을 들고 나오면
마당의 개들이 일제히 꼬리를 치기 시작했다
살랑살랑살랑
고개를 처박고
텁텁텁, 다투어 밥을 먹는 짐승의 소리가 마른 뿌리 쪽에서 들렸다
빈 그릇을 핥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 마른 들판 한가운데 서서
얼마나 허기졌다는 것인가, 나는
저 한가득 피어 있는 흰 꼬리들은
뚝뚝, 침을 흘리며
무에 반가워
아무 든 것 없는 나에게 꼬리를 흔드는가
앞가슴을 떠밀며, 펄쩍
달려드는가
상희구, 숟가락
곤고했던 한 생애
마침내 자신의 위대한 소임을 다하고는
반구형(半球型)의 봉긋한 무덤하나 남기다
길상호, 알약
병실에서는 TV까지도 환자다
500원 알약 하나를 받아먹고 나서야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네 얼굴
할머니들은 아픈 TV를 끼고 앉아
손자손녀 재롱잔치라도 보는 듯
식은 눈동자를 초롱초롱 되살린다
하지만 알약의 약발은 겨우 삼십 분
기다렸던 드라마 시작과 함께
TV는 미지근해진 심장을 끄고
다음 순번의 할머니가
뒤적뒤적 숨겨둔 지갑을 꺼낸다
빨리 되살리라고 숨넘어가겠다고
재촉해대는 한숨 사이에서
바쁘게 알약을 찾아 TV에게 먹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진 화면
잠시 또 어둠이 걷히는 병실
겨우 연장시킨 시간도 순식간이다
내일을 기약하며 드라마가 끝나면
기약 없는 내일이 침대에 드러눕는다
돈은 좀 들었지만 시간 잘 죽였다며
할머니들 아쉬운 잠을 청한다
김주대, 눈 오는 저녁의 느낌
하늘을 뜯어내는 듯이 눈이 내린다
저러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빈집처럼 어두워지고
허공이 다 무너지겠다
대지를 밟고 오는 나무가 긴 그림자를
저녁 근처에 끌어다 놓았다
큰 산이 상체를 일으켜
검은 구멍 같은 저녁을 내려다보고 있다
어둠이 눈발 속으로 우멍하게 퍼진다
마지막 기차가 떠나고
눈발이 너를 지운 자리에 너는 돌아온다고 했는데
노래는 기울어져 여행가방처럼 앓는다
기억이 눈발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저녁 속으로 걸어가 어둑한 상처에 기댄다
빈집처럼 뜯어져내린 하늘이
우리가 없는 무거운 저녁에 닿는다
부리를 잃은 새가 붉은 심장을 할딱거리며
생각이 이르지 못한 곳까지
눈보라 속을 날고 있다
우영규, 뾰족한 밤
지금 뭐 하느냐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등 하나 밝혀놓고
밤이 일찍 무너지지 않게
잘 떠받치고 있다
그대는 애타고 나는 여유롭다
공중에서 밤이 뾰족하다
밤은 밤 아닌 때가 없구나
그대는 한가하고
나는 뜬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