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동, 바다
빈 몸으로 왔다
바다
그래도 고마워서
온몸으로 반기는 바다
나는 너에게
무엇을 바쳐야 할 것이냐
말하여라 말하여라
망설임도 꾸밈도 없이
네 본연의 목소리로
고영민, 통증
중국에는 편지를 천천히 전해주는
느림보 우체국이 있다지요
보내는 사람이 편지 도착 날짜를 정할 수 있다지요
한 달 혹은 일 년, 아니면
몇 십 년 뒤일 수도 있다지요
당신에게 편지 한통을 보냅니다
도착 날짜는 그저 먼 훗날
당신에게 내 마음이
천천히 전해지길 바랍니다
당신에게 내 마음이 천천히 전해지는 걸
오랫동안 지켜보길 원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수십 번, 수백 번의 후회가 나에게 왔다가고
어느 날 당신은
내가 쓴 편지 한 통을 받겠지요
겉봉을 뜯고 접은 편지지를 꺼내 펼쳐 읽겠지요
그때 나는 지워진 어깨 너머
당신 뒤에 노을처럼 서서
함께 편지를 읽겠습니다
편지가 걸어간 그 느린 걸음으로
내내 당신에게 걸어가
당신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한 홉 한 홉
차올랐던 숨을 몰아 내쉬며 손을 내려놓을 즈음
편지 대신 그 앞에
내가 서 있겠습니다
이인원, 사랑은
눈독 들일 때 가장 아름답다
하마
손을 타면
단숨에 굴러 떨어지고 마는
토란잎 위
물방울 하나
류호숙, 성깔머리
물이 끓는다
주전자 속의 요동이 심상찮다
부글, 부글, 부부글
오늘 옆집 김 씨가 또 열 받았나 보다
동네 사람들은 김 씨를 물이라 부른다
평상시엔 냄비엔 담기든 소주잔에 담기든
담아내는 그릇마다 척척 달라붙으니
아무도 그를 미워하는 이가 없다
어쩌다 쏟아지고 밟혀도 성질부리지 않고
여간해서 찡그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주전자가 불씨 위에 얹히면
더러운 성깔머리로 바뀐다
반쯤 눈을 흘긴 애
온몸에 땀을 흘리며 펄펄 끓어 넘친다
지칠 줄 모르고 사지를 흔들어 댄다
얼마 후 잠잠해지면
그건 부인이 불을 껐다는 거다
비등점이 김 씨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차라리 얼음판이면 거울 되어
화려한 햇살을 반사할 텐데
전흥규, 나는 나의 인연
집 앞 사거리에서 서북쪽으로
돌아나갈 때 종종 너를 만난다
분명 어디서 본 듯한데
마주앉아 같은 곳을 보며
친밀한 대화를 나눈 것 같은데
서로 스쳐지나 가면서도
인사를 나눌 수 없다
등 뒤로 환영이 뜨고
그 마저 사라져 보이지 않아도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디서부터 끊긴지를 모르겠다
오늘은 후광 환한 모습으로
웃음 가득 물고 온다
여기까지 좋아지는 기분이
천천히 와서는 횡 지나간다
첫사랑이었을까
신나는 일을 꾸미려고 만났었을까
내 어머니였을까
인사를 건네지 못하는 나는
환풍구에 서성이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