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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s9brwV-uQlk
이성선, 영혼의 침묵
영혼은 내 안에서 침묵한다
가장 고요한 시간
목숨의 심지에서 영혼이
깨어나
불꽃으로 타오르면
나의 육체는 그릇이 되어
이끼 낀 샘물로 맑게 고이 떤다
그를 위해 조금씩 몸을 비운다
기도 속에
촛불이 그림자 떨듯
그는 내 안에서
물을 길으며 노래한다
내가 하나의 갈대로 서서
사색하며
별을 지키는 밤에도
바람으로 아니 눈물을 넘어서서
나를 밟고 신비한 피리 분다
등잔이 비어 있을 때만
영혼의 아름다운 피리소리가 들린다
타오르는 춤이 보인다
그 밤에만 그에 귀를 밟히고 섰거니
나의 몸은
이 영혼을 모시는 사원
그를 위해 여기 돌아와 섰다
그가 타오르면
조금씩 나를 하늘로 길어가고
다시 우주의 침묵을 내려
내 등잔을 채우는 시간
나는 이 땅에 떠 있는 석등
조용히
그를 불 밝히는 그릇
김승희, 매혹된 길
한밤중에 목이 말라
문득 불을 켜고 부엌으로 나가지
너절한 부엌바닥 위로
무언가 반짝이는 것들이 기어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난 문득 맨발을 움츠리며
부엌바닥을 응시하네
검정콩 한 개, 파 반 쪽, 멸치 반 동강들이
떨어져 있는 모노륨 바닥 위로
열심히 손발을 바들바들 저으며
기어가고 있는 것들
모세를 따라가는 엑소더스처럼
반짝반짝 귀기(鬼氣)를 발하며
무엇을 구해 기어가고 있네
내 발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가, 너희들
부엌 귀퉁이
싱크대 바닥에 감추어둔
바퀴 오라오라 향기를 향해
열심히 손발을 저으며 기어가는 것들
바들바들 떨면서
어서 가자 가자고 나에게 손짓하는 듯하네
김상현, 치과에서
마취된 내 입술 속에
서른두 개의 이빨이 갇혀 있네
수년째 앓이하던 사랑니는 빼버리고
구멍 뚫린 어금니는 메워 버리고
뿌리째 썩어버린 이는 신경을 죽여버리고
아직은 그런대로 쓸만한 것은 추스려
내 남은 인생의 입맛을 보려고 하네
내 한날을 잡아
마음을 이처럼 마취할 수 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수년째 가슴앓이 하던 그리움도 빼버리고 싶네
애잔한 추억의 빈자리도 이제는 메워 버리고 싶네
갈고 닦을 이가 더는 없이
잇몸만 남는다 해도
잇몸만 드러내 놓고 웃을 수 있는
안은주, 소리의 계보
산새가 울고 있는 아버지 무덤에 가보고 알았다
소리에도 무게가 있다는 것을
새 울음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중력 때문이 아니라
잘 익은 소리의 무게 때문이다
새 울음이 공중을 선회하여 몇 바퀴 구르는 것도
몸 안에 웅크렸던 소리가
나선형을 그리며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소리는 새의 몸 어디에 고여 있었을까
태어날 때부터 몸 안에 저장되어 있던 울음은
숨구멍이 열리는 순간부터
어둠을 거슬러 온몸으로 뜨거워지며
부리 끝으로 가고 있었다
거기서 또 하나의 잘 익은 리듬을
익히고 다듬어냈던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울음이 서서히 말라가는 것도
소리가 빠져나가기 때문이 아니라
울음과 공명 사이에 더 푸르고 탱탱한 소리를 채워
다시 태어나기 위한 것이다
소리는 따로 문패를 달지 않아도
태초(太初)부터 수억 년을 이어온 계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소리는 죽지 않는다
상여 소리를 타고 날아간 아버지는 죽지 않는다
내 몸이 새가 되고 싶은 것도
날개 보다는 소리의 비밀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탄생과 사랑과 죽음 속에 소리의 비밀이 있다
구재기, 얼음조각은 상처를 보이지 않는다
얼음조각은 제 몸에
칼금을 남기지 않는다
날카로운 칼날이 지나간 상처를
눈물로 씻어 제 몸을 조금씩 소멸한다
눈물이란 상처를 다스리며
제 몸을 점점 소멸해 나간다는 것
아, 어머니는 살아생전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사위어내셨을까
지상의 한 자리에는
인절미 같은 어머니의 눈물자국
그리고 눈물자국 속에는
보이지 않는 흥건한 상처들
푸르른 오월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또 다른 생에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결혼식장 로비 한 가운데
얼음 조각은
제 몸을 삭혀내면서
작은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삭혀내는 눈물로
메마른 가슴들을 모두 적시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