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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명예살인
게시물ID : panic_892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2222
추천 : 27
조회수 : 1708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6/07/15 03:4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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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주말 오후, 최신 스릴러 소설을 읽고 있었다. 머리 정돈이 안된 20대 남자가 사무실에 들어섰다. 일주일 머리를 감지 않았거나, 머리 기름이 하루에 일주일치 솟아 나는 타입이겠지. 어쨌든 지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린 모습이었다. 남자는 바로 털어 놓았다.

“사람을 죽였어요. 압니다. 어떤 일이 펼쳐질지.”

머리 냄새보다 좀 더 심각한 일이다. 남자는 머리 속도 엉망진창이었다. 한 시간 횡설수설한 것을 그러모아 정리해보자. 그러니까, 어느날 퇴근해서 문을 여니, 동거하던 애인이 살해당해 있고 성폭행이 있은 것이 틀림없었다. 범인도 모자란 놈이었다. 애인의 스마트폰에 녹음이 켜져 있었고, 들어보니 제일 친한 친구 녀석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죽음에 임박한 공포의 목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극적인 일은 없다. 집으로 찾아가 망치로 몇 대 때렸다. 영화처럼 피칠갑을 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자 일어서서 나왔다. 그 뿐이다. 그게 여섯 시간 전 일이다. 곧 수사가 시작될 것이다.

“후회는 안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자수하실 건가요?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나는 감정없이 말했다. 그래야 전문가처럼 보인다.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무엇을 하든, 제 마지막 선택이 되겠죠. 무엇을 해야할지 그걸 상담하러 온 겁니다. 처음에는 나도 오피스텔에서 뛰어내려 죽으려 했었죠. 자수하고 재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제 정신인지 모르겠네요. 힘든 하루였거든요. 마지막 선택이면 제대로 상담받고 결정하는게 낫죠.”

똑똑한가, 바보인가. 내가 보기엔 후회 안할려고 아둥바둥 버티는 바보다. 후회없는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두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불행히도 그런 걸 고민하지 않는 사람만이 삶에 후회도 없다. 자. 이제 상담의 시간이다. 나는 이 남자의 고민을 완벽하게 해결할 참이다.

“그런 걸 명예살인이라고 하죠. 그게 인정되는 나라가 있죠. 들어 보셨습니까?”

“인도나, 또 이슬람 국가요?”

“그 나라들은 관습적으로 용인할 뿐, 명예살인을 공식적으로 용납하진 못합니다. 밀항한다해도 범죄자 인도 요청을 하면 재깍 송환되겠죠.”

“지금 절 놀리시는 겁니까?”

남자는 아드레날린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비현실적인 하루에 지친 나머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감당 못하는 것이다. 혹시 망치를 들고 온 건 아니겠지.

“천만에요. 그런 곳이 있습니다. 애인의 명예를 위해 살인을 했다면 국가적 영웅이 되는 곳이요. 망명도 당연히 받아줄 것이고, 연금도 나옵니다. 교통비용도 부담할 겁니다.” 나는 뜸을 들이며 말한다. 안믿을 것 같지만 말할 수 밖에.

“절 믿고 상담받으러 오셨겠죠? 황당한 소리 같겠지만, 믿든 안믿든 그것도 당신의 선택입니다. 알파센츄리에서는 명예살인자를 받아들입니다.”

남자는 받아 들인다. 절망적인 순간에는 뭐든 믿고 싶기 마련이다.

“행성간 워프존 비용은 그쪽에서 착불로 가능합니다. 상담료와 주선 비용은 선불로 주고 가셔야 합니다.”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갑을 꺼내 들었다. ATM기를 탈탈 털고 온 것 같았다.

“신촌 사거리쪽으로 백미터만 걸어가면 유학원이 서너 개 나옵니다. 파란 간판집으로 들어가세요. 거기있는 덩치 큰 외국인 강사가 알파센츄리의 대사입니다. 보기만 해도 알거에요. 알파센츄리 사람이구나. 딱 느낌이 와요.”

“그런데 왜 모르죠? 외계인이 신촌 한복판에 걸어 다녀도 몰라요?”

“글쎄요. 편견은 두터워서, 보고 싶은 대로 보이게 만들거든요. 외계인이라고 생각해야 비로소 외계인으로 보이는 겁니다.”

남자가 떠나고 난 후, 지구 기준으로는 범인 은닉, 도피의 공범이 되어 버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알파센츄리 법으로는 정치적 망명을 도운 명예로운 일이다. 연금이야 없겠지만... 다른 사람의 짐을 들어 줄 때는 손에 흙탕물을 묻히는 씁쓸함도 감수해야 한다.

나는 찻잔 속에서 장미빛으로 번져가는 홍차를 보며 생각했다. 그곳의 중력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지구보다 중력이 열배니까, 걸어 다닐 순 없을 것이다. 고개도 까딱하기 힘들겠지. 독방에 갇혀 족쇄를 찬 것처럼 지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편한 쪽이 더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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