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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류, 햇살검객
햇살은 가끔 날이 설 때가 있다
날을 세워 다가올 때가 있다
칼날처럼 날이 선 햇살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어쩌다, 깊숙이 베일 때가 있다
칼날은 계절마다 다른 검법으로 다가온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폭염검법에
차갑게 부서지는 혹한 검법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춘추검법까지도
모두 경험을 해 봤다
칼날에는 칼잡이의 혼이 들어 있어, 어떨 때는
한번 휘두른 칼날에 가슴을 철렁 베일 때가 있다
또 어떨 때는 마음이 동강날 때도 있다
모르는 사이 눈동자를 쓱싹 베일 때도 있다
우멍한 눈을 파고드는 우수(憂愁)검법은
춘추검법의 한 지류이지만
오랜 기간 숙련되어 으뜸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나는 우수검법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불혹을 지나 지천명으로 가는 길에
아차, 또 만나고 만 햇살검객
피할 방법을 찾지 못 했다 오늘도 나는
눈이 베였다
말간 피로 눈동자를 씻었다
배후는 늘 허공이었다
최문자, 위험한 식사
무서운 일이다
50년 이상 매일 매끼니
저 불량한 밥을 위하여
세상에다, 끝도 모서리도 없는 둥근 밥상 하나 차리는 노동
거품 물듯 흰 밥알 한 입 물을 때마다
이빨과 이빨 사이에서 와와, 흩어지던 으깨진 희망
산다는 건
세상이 나를 질겅질겅 밟고 지나가는
아, 말발굽 같은 식사
산다는 건
아주 벙어리인 나로 깔릴 때까지
밥상 하나 차리며, 밥상이 나를 차리며
서로 반질반질하게 길들이는 노동
무서운 일이다
50년 넘게 이렇게 매일 매끼니 밥을 이기며
아슬아슬하게 밥을 먹어치우는 위험한 식사
저 불량한 칼 같은 밥을 먹기 위하여
꼭두새벽
나는 숟가락 하나 들고 나선다
이하석, 분홍강
내 쓸쓸한 날 분홍강가에 나가
울었지요, 내 눈물 쪽으로 오는 눈물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사월, 푸른 풀 돋아나는 강가에
고기떼 햇빛 속에 모일 때
나는 불렀지요, 사라진 모든 뒷모습들의
이름들을
당신은 따뜻했지요
한 때 우리는 함께 이곳에 있었고
분홍강가에 서나 앉으나 누워있을 때나
웃음은 웃음과 만나거나
눈물은 눈물끼리 모였었지요
지금은 바람 불고 찬 서리 내리는데
분홍강 먼 곳을 떨어져 흐르고
내 창 가에서 떨며 회색으로 저물 때
우리들 모든 모닥불과 하나님들은
다 어디 갔나요
천의 강물 소리 일깨워
분홍강 그 위에 겹쳐 흐르던
문태준, 누가 울고 간다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불러 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 낼 수 없는
이성선, 생명
바닷가에서 작은 조가비로
바닷물을 뜨는 아이처럼
나는 작은 심장에 매일
하늘을 퍼 뜬다
바다아이가 조가비에
바다의 깊은 물을
다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허파도 하늘을 다 담지 못한다
그러나 조개껍질에 담긴 한 방울의 물이
실은 바다 전체이듯
가슴 속에 담긴 하늘 또한
우주전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