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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HDtwuDnCW7Q
장석주, 파리
비굴했다
평생을
손발 빌며 살았다
빌어서 삶을 구하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끝끝내 벗지 못하는
이 남루
박창기, 낮잠
햇살이 통통 튀어 와 담 밑에 앉는다
자리를 깔고 따끈한 아지랑이 한 컵 내놓는다
손가락을 녹이고 등을 덥힌다
다리를 슬그머니 풀더니 눈꺼풀을 내린다
무너지는 건 순간이다
참 맛있겠다
차영호, 눈잣나무
저런 생도 있었거니
중청(中靑)에서 대청(大靑)사이
칼바람 돌너덜에 납작 엎드린
명(命)
일어서기는커녕
기지개 한 번 못 켜고
눈물에 만 밥을 먹는 이여
지구 한 귀퉁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그대
내려가면 나도
어깨를 으쓱이며 걸어야겠다
권선희, 길을 보면 가고 싶다
천천히 걸어가는 길의 뒷모습이나
황급히 사라지는길, 치마꼬리를 향해
서 있었다
오랜 배웅의 시간
간혹 길은 바다로 첨벙 뛰어 들기도 했다
그럴때면 얼음공장 벽에 기대어
물살 가르고 튀어 오르는 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아무꽃도 피어나지 않는 시멘트 바닥에서
비린내 쪼아대는 햇살
햇살을 물고 한떼 새들이 날아오르면
다시 뭍으로 오른 젖은 길들은
숲으로 걸어갔다
길이 지나는 자리마다
겟멧꽃이 피고 마늘순이 노랗게 말라갔다
종꽃이 지고 뱀딸기가 익었다
할배는 먼 산으로 가고 아이는 더디 걸었다
그렇게 나는 길을 보내고 있었다
너른 등짝이 모퉁이를 돌아가는 내내
돌담이 붉었다
꽃을 주고 길이 또 간다
이애리, 생강나무부적
동박새가 생강나무 꽃망울 터트리고
맘 준비 없이 초경을 시작해 울고 말았던
내겐 슬픈 꽃으로 피는 둥근잎생강꽃
봄만 되면 아팠던 엄마를 위해
외할머니는 복상골 땡삐무당을 데려와
정성껏 메밥을 짓고, 엄마 머리카락을 잘라
바가지에 담아서 퇴송 굿을 했다
나는 생강꽃으로 소꿉놀이를 하다가도
엄마 심장이 뛰는지 안방 문을 열곤 했다
꽃 몸살 앓으며 생강꽃 피어날 때
엄마의 베갯속에 새(鳥)부적을 그려 넣던
땡삐무당의 입에서 동박새를 부르는
휘파람이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