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써본다.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뉴스에서 경제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하는 내용이 나오면 그렇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적인 영향력이라는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사회에 나오고 취업을 준비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뉴스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했던 것인지, 지금에서도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정치부터 경제, 그리고 국민들의 의식. 많은 문제가 있다. 놀라울 정도로. 이건 누구나 느끼는 바인데, 정치인들이, 재벌들이 잘해야 한다, 국민들이 멍청하다,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이제 어찌 할 수 없는 수준인 것 같다. 정말 사실이니까. 경제에 관련된, 정치에 관련된, 국민들의 의식에 관련된 글을 계속 보면서 느끼는 생각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세계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들을 옹호하느냐고? 절대 아니다.
이 사회의 기초에 사실 가장 필요한 건, 세계에 내세울만한 기술력이나 돈, 있어 보이는 문화 산업 같은 게 아니라 철학과 인문학이다. 정말 어디부터 말을 할 수 있을지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사회의 어느 저변에도 철학과 인문학이 없으니.
모르겠다. 쓸 수 있는 대로 써보겠다. 좀 전에 우리나라 기업들이 향후 10년 이후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글을 봤다. 주된 내용이 기초 과학이 부족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나는 읽었다. 그런데 그냥 가만히 있으면 기초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어느 곳에서든 현재의 마이너스를 견디고 미래의 플러스를 위해서 투자를 해야 하는 거다. 그런데 투자라는 게, 사람들의 기본적인 심리에서 이해를 할 수 있을까. 1년을 투자해서 10년의 삶을 유지하는 결과를 얻는다면 쉽게 투자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초 과학의 투자는 문외한인 내 생각으로도 몇 십 년은 걸리는 일이다. 누가 그 투자를 쉽게 결정할 수 있을까. 이 생각을 해야 하는 건, 지도층이다. 그리고 그 결단을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한다. 지도층이 단순히 멍청하다고? 글쎄, 그들은 그들 나름의 최선이다. 물론 그들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정도 수준의 지도층이니까. 그들에게 부족한 건 뭘까. 무엇보다 철학과 인문학적 자세다. 타인에 대한, 미래의 후손에 대한,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없이, 현재의 내 주머니가 조금 비는 게 싫은 거다. 내일 굶더라도 지금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어야 한다. 왜냐, 그런 사회에서 교육받아 왔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건 참 슬픈 일이지만, 참 어쩔 수 없다. 전쟁 이후의 삶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는 게 힘든 사회였고, 남이 굶어 가는 걸 보면서도 스스로는, 가족들은 먹여야 했으니까. 그렇게 자라난 세대들은 그렇게 자식들을 키워왔고, 가르쳤으니까.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남들보다 조금 더 배부르게 먹는 거였으니까. 먹는 게 해결이 되면, 그때부터는 내가 아닌 굶는 타인에게 내 손에 남은 걸 건네줘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고 차라리 쓰레기통에 버리고 만다. 왜냐, 그래야 저 타인보다 내가 나으니까. 저 사람이 내가 준 것을 먹고 나와 똑같이 배부른 것을 참을 수 없으니까. 늘 비교하며 누군가와 우월해야 하는 삶을 교육받아온 사람들은 그것 말고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거다. 몰고 다니는 자동차가 명함이라는 말이 한국 사회엔 있다. 실용이고 자시고, 자동차의 가격이 그 사람의 수준인 것이다. 무슨 개소리인가. 철학과 인문학이 교육에 제대로 깔려 있었다면,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것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무의식 깊이 그것이 체화 되었다면 이런 사회가 되었을까? 나와 타인이 다르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는 교육을 받았다면 자동차 따위가 명함이 될 수 있었을까?
정치인들도 그 정치인들을 뽑는 국민의식도 결국엔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을 스스로 국민을 대표한다는 특권의식이라는 게 있고, 아버지의 대를 이어 정치를 하는 아들이 나오고, 정치인들의 대부분은 국민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삶의 여유를 누리고 있다. 그들의 삶 자체가 다르기에, 그들은 국민들과 스스로를 분리해내 특권화 시킨다. 더 무서운 것은 국민들이 그 특권의식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말이 되는가. 내가 정치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내 생각의 정치란 이런 것이다. 열 사람이 모인 집단이 열 개가 있다. 그럼 백 명의 이야기를 모두 듣기 힘들기에 열 사람이 모인 집단에서 각각 한 사람씩을 선출해 열 명의 대표를 만든다. 그리고 그 대표들은 열 명의 의견을 타당하게 수렴에 대표단 회의에서 열 사람의 의견을 타진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의회 정치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의 규모가 클 뿐, 현재 사회의 정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틀릴 수도 있다. 제대로 공부해 본 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정치는 국민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열 명의 대표단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의 말만을 듣고 회의에서 그 말을 전달한다. 나머지 여덟은 그저 소외다. 왜냐, 목소리가 작으니까. 목소리 큰 사람이 한 번 찍어 누르면 모두 입을 닫으니까. 뭐 그렇다. 욕하고 싶지만 참는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나머지 여덟이다. 여덟은 힘을 합치면 둘 정도는 자신들의 집단에서 배척시키고 새로운 하나를 뽑아낼 수 있다. 하지만 목소리가 큰 누군가가 하나씩 찾아가 그들을 회유하거나 찍어 누른다. 그럼 여덟 중 많은 이들은 목소리큰 자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인양 착각한다.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도 목소리가 커진다고 착각하니까. 그리고 목소리가 더 작은 자들을 무시한다. 왜냐, 자신은 특권층과 가까우니까. 가깝다라니. 정말 부끄럽다. 이미 이렇게 된 상태에서, 열 개의 모든 집단이 모인 회의가 민주적으로 대화 전달이 될까? 목소리 큰 누군가의 말이 백 명을 대표하는 말이 된다. 나머지 팔십은 침묵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하거나, 방에서 홀로 괴로워 할 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본다. 이 사회가 역사적으로 어떻거나, 결국엔 따뜻한 철학적, 인문학적 교육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어야 했다. 친일파의 해방 이후 위치에 대해선 얘기하고 싶지만 말겠다. 욕하고 싶어질 테니까. 사회가 살기 힘들고 어쩌고 해도, 부모들은, 선생들은 아이들을 사람으로 교육시켰어야 했다. 먹고 싸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고 이해하고 울고 웃고 작은 목소리라도 높일 수 있는 사람, 즉 주체 말이다. 하지만 교육에서부터 등수로 아이들을 쭉 나열하고, 뒤로 밀린 아이들은 화가 난다. 내가 그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니까. 겨우 등수라는 걸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저 아이가 나보다 더 인정받고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인식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집에 돌아가면 부모들은 말한다. 넌 왜 뒤에 있어? 뒤에 있는 친구 때문이잖아, 앞에 있는 친구랑 만나. 그리고 걔 앞으로 가. 무슨 소리인가. 정말. 아이들은 가로든 세로든, 줄을 설 필요가 없다. 운동장이 그렇게 넓은데 뭣하러 줄을 세우나. 맘껏, 정글짐이나 철봉, 나무 아래, 테니스장 같은 곳에서 맘대로 있어도 된다. 그런데 왜 꼭 줄을 세우고 아이들 스스로의 자존감을 획득하는 걸 막아 버리나. 부모나 선생들이나, 암묵적 동조자들이다. 물론 이들도 제대로 된 인문학적 교육을 받지 못했을 테니까, 라고 자위하고 싶지만 그냥 빌어먹을이다. 친일, 아니 말자. 그래 말자. 교육이란 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거지만, 크게 흐름을 거스르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물길은 스스로 방향을 찾아 나간다. 수많은 강과 도랑의 모양새가 자연에 맞게 다르듯이 말이다.
뭐라고 썼는지 모르겠다. 그냥 화가 나고 부끄럽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이 사회에 필요한 것은 돈 이전에 나와 타인의 사이를 인정하는 거라고 본다. 내가 말을 해야 내가 여기 있음을 상대에게 알리고, 상대가 말을 해야 상대가 거기 있음을 안다. 그리고 서로 들어주는 이가 있어야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둡고 끝없는 공간에 홀로 있다면, 나는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아무리 외쳐도 들어주는 이가 없을 텐데. 스스로 강한 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이 있어야 내가 있다. 그리고 내가 있어야 타인이 있다. 이것이 사람들이다. 우린 사람들 사이에 있다. 그걸 이해하는 건 어려울지 모르지만, 어렵기에 노력해야 한다.
모르겠다. 나는 사람이 참 싫지만, 나는 사람이다.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