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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북촌에 내리는 봄눈
북촌에 내리는 봄눈에는 짜장면 냄새가 난다
봄눈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짜장면 배달 가는 소년이 골목 끝에서
천천히 넘어졌다 일어선다
북촌에 내리는 봄눈에는 봄이 없다
내려앉아야 할 지상의 봄길도 없고
긴 골목길이 있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나는 오늘 봄눈을 섞어 만든 짜장면 한 그릇
봄의 식탁 위에 올려놓고 울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 한 그릇
먹고 싶어한 아버지를 위하여
봄눈으로 만든 짜장면을 먹고
넘어졌다 일어선다
장병훈, 늙은 호박
자기 속을 긁어내고, 내 안으로 들어온다
어둡던 동굴 속, 환한 불이 켜진다
제 몸을 다 퍼준 속이 경전 속 말씀보다 향기롭다
제 몸을 다 내 준 껍질이 절집보다 깊다
강영은, 저녁과의 연애
저녁의 표정 속에 피 색깔이 다른 감정이 피었다 진다
보라 연보라 흰색으로 빛깔을 이동시키는 브룬스팰지어자스민처럼
그럴 때 저녁은 고독과 가장 닮은 표정을 짓는 것이어서
팔다리가 서먹해지고 이목구비가 피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여럿이 걸어가도 저녁은 하나의 눈동자에 닿는다
빛이 굴절될 때마다 점점 그윽해져가는 희랑처럼
그럴 때 저녁은 연인이 되는 것이어서
미로 속을 헤매는 아이처럼 죽음과 다정해지고
골목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화분이 나뒹구는 꽃집 앞에서 콜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이 생각나기도 한다
내일이면 잊힐 메모지처럼 지루한 사간의 미열처럼
그럴 때 저녁은 연애에 골몰하는 것이어서
낡은 창틀 아래 피어 있는 내가 낯설어진다
어떤 저녁에는 내가 없다
이내 속으로 풍경이 사라진 것처럼
저녁이 남기고 간 자리에 나는 없더라는 말
그럴 때 저녁은 제가 저녁인 줄 모르고 유리창 속으로 스며든다
혼자라는 위로는 불현듯 그때 수백 개의 얼굴로 찾아온다
송재학, 복사꽃에 떠밀려
사람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복사꽃이 핀다 나무보다 먼저
햇빛에 이르러 마음은
희고 붉은 꽃잎 속 타는 혓바닥처럼
복사꽃에 떠밀리면
허리 굽혀 어머니를 껴안는 산길
봄비를 오게 하는 무덤
허수경, 연필 한 자루
그렸다
꿈꾸던 돌의 얼굴을 그렸다
하수구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서 있던 백양목
부서진 벽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깨
붉게 울면서 태양과 결별하던 자두를 그렸다
칼을 목에 내밀며 검은 중심을 숲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멸종해가던 거대 짐승의 목
먹다 남은 생선 머리 뼈 꼬리 마침내 차가운 눈
열대림이 눈을 감으며 아무도 모르는 부족의 노래를 듣는 거
태양이 들판에 정주하던 안개를 밀어내던 거
천천히 몸을 낮추며 쓰러지는 너를 바라보던 오래된 노래
눈물 머금은 플라스틱 봉지도 그 봉지의 아들들이
화염병의 신음으로 만든 반지를 끼는 거
어둠에 매장당하는 나무를 보는 거
사랑을 배반하던 순간, 섬득섬득 위장으로 들어가던 찬물
늦여름의 만남, 그 상처의 얼굴을 닮아가면서 익는 오렌지를 그렸다
마침내 필통도 그를 매장할 때쯤
이 세계 전체가 관이 되는 연필이었다, 우리는
점점 짧아지면서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했으나
영영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단독자, 연필 한자루였다
헤어질 사람들이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물속에서
영원한 목욕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한 자루였다
당신이여,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