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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례, 가난한 풍경
외롭다는 이유로
세상 등지고 싶은 사람 하나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건
그도 배고프고 나도 배고팠던 것
세상을 등진 그가
나에게 한 발짝 다가오면
벼랑을 등지고 사는 나
물러설 곳이 벼랑이어서
벼랑이 한 발짝 가까워지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 하나로
물러설 곳도 나아갈 곳도 잊고
주머니에서 풀씨 몇 개
비상금처럼 털어내고 있다
하마터면 나도 외롭다는 말을
탈탈 털어놓을 뻔했다
박목월, 난(蘭)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 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나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정호승, 여행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강성은, 아름다운 계절
눈보라가 그치고 무지개가 떴다
죽은 개를 묻으러 무지개 너머로 갔다
어젯밤 내 얼굴을 핥던 개
잠 속에서도 내 얼굴을 핥았다
깊은 밤
내 혀는 한없이 길어져
낯선 얼굴을 핥았다
침이 흥건했다
죽은 개를 묻으러 무지개 너머로 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김광렬,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 있다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 있다
덜컹덜컹, 때로는 미끄러지듯
내가 닿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
그리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바퀴가 굴러가는 속도는 빠르다
어느새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닿아 있다
너는 모르지 너의 곁에 내가 있다는 것을
지금 바로 출발한 내가
너의 손에 편지처럼 들리어져 있는 것을
이별이 바퀴를 굴리며 떠나가듯이
그리움도 바퀴를 굴리며 떠나간다
이별이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헤어졌다고 그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움으로 슬픔을 덮으며 살기도 한다
그리움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서
늘 너에게로 떠날 수 있어서
이별은 있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