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례, 기울어진 집
어둔 길 혼자 가야겠다
가시밭길 혼자 가야겠다
작심한 길인데 사람 그립다
미워도 미운 것만 아니고
좋아도 좋은 것만 아니어서
어둠 깊을수록 잠 못 드는 날 늘고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멍에도
일손 놓아버린 날 많으니
파도는 바람 때문인가 바다 때문인가
혼자 길을 가다
어깨 기울어진 빈집 보면
세상일 눈먼 사람 불러 살고 싶은데
주변엔 아무도 보이지 않고
허기를 달래며 나는 빈집을 기웃거린다
김민서, 장마
비 온다
끊어진 듯 이어지고
잦아들다 격해지며
비 온다
오로지 한 길로
오롯이 한 마음으로
말갛게 질겨지는 이 빗줄기
낱낱이 바늘귀에 꿰어
터진 마음의 솔기를 기우면
수몰은 면할 수 있을까
비 온다
어느새 정강이를 적시고
허리 명치 지나
기어이 쇄골까지 차올라 흥건한
그리움의 벅찬 물살
그리움은
철없이 장마 지고
한없이 범람하는
내 안에 있는 외부
이번 생은
도무지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내 안으로
그대의 속으로
깊이깊이 수장되리라
백상웅, 그저 그런
가방이 뜯어졌다
속에 든 모든 게 쏟아졌다
언제 집어넣었는지도 잊은 영수증, 책, 동전
너무나도 익숙한 흔들림이나 덜컹거림까지도
쏟아졌다
게을러서 여태 내가 기대고 살았다
장대비에 젖고 눈발에 얼고 한 날은 햇볕도 쬐고
하면서, 가방은 울상이었다가 펴지기도 하면서
연애도 하고 이별도 했다
이력서도 쓰고 면접에서 떨어져도 봤다
인조가죽이라 망조가 오래전부터 보였다
짐승이 되려다가 만 가방, 짖다가 그만둔 가방
소처럼 여우처럼 악어처럼 고래처럼
착하지도 나쁘지도 못하는 가방
가방이 제 밑바닥으로 입을 벌렸다
찢어지면서 이빨의 형상까지 만들었다
이제 이 가방의 시대는 끝났다
서상만, 달팽이
풀잎과 풀잎 사이
묵언(黙言) 십리길
늘 같은 걸음
가도 가도
논두렁 벗어나지 못하고
밤새껏
달빛 묻은 맨발로
어딜 가실까
조동례, 물들어간다는 것은
물들어간다는 것은
마음 열어 주변과 섞인다는 뜻이다
섞인다는 것은
저마다의 색을 풀어 닮아간다는 것이니
찬바람이 불 때마다
밀었다당겼다 밀었다당겼다
닫힌 마음이 열릴 때까지
서로의 체온을 맞춰가는 것이다
태양이 어둠을 받아들이는 것도
봄꽃이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내는 것도
마음이 닮아가는 것이고
마음이 닮았다는 것은 편하다는 것이고
편하다는 것은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네가 아프면 곧 내가 아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