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은, 단지 조금 이상한
아직 이름이 없고 증상도 없는
어떤 생각에 빠져 있을 땐 멈춰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시 생동하는 세계와 같은
단지 조금 이상한 병처럼
단지 조금 이상한 잠처럼
마음속에서 발생하는 계절처럼
슬픔도 없이 사라지는
위에서 아래로 읽는 시절을 지나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읽는 시절을 지나
이제는 어느 쪽으로 읽어도 무관해진
노학자의 안경알처럼 맑아진
일요일의 낮잠처럼
단지 조금 고요한
단지 조금 이상한
김소연, 이 몸에 간질간질 꽃이 피었네
오래도록 밟아서 생긴 숲길을
아무 작정 없이 걸어보았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눈치 채는 이가 없었네
품에 안겼던 사내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되자
심장에 뿌리를 박고
분꽃들이 만개했네
다 알 만한 물방울이
풀 끝에 맺혀 있었네
아득히 들리던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땀구멍을 뚫고 채송화가 피었네
멀리 누런 벼들은
논바닥에 발톱 벗어둔 채
누워 있었네
나는 발이 시렸네
발가락 사이로 패랭이가 피었네
허벅지를 타고 나팔꽃이 만개했네
오래도록 밀봉해 둔 과실주를
아무 작정 없이 열어 독배하였네
새들이 울어댈 때 귓속에 길이 열렸네
길을 잃어도 길 속에 있었네
이만섭, 침묵의 발견
수문을 열고 나오는 저수지의 물은 파죽이다
제 안에 침잠하던 고요가 사자후처럼
기세를 내뿜는 사이 난간에 피어내는 물꽃
울음의 형식으로
폭죽의 형식으로
폐부가 이렇다는 듯 고요를 쏟아 꽃 피워낸 물의 사연을
새끼줄 같은 내력으로 잇고 가는 강
말은 애초에 미약해서
도리 없이 침묵을 택했던 것이다
귀의 입으로 소리를 삼키며 천천히 몸속에서 숙성한 말들은
뼈에서 가져온 듯 밀밀해져 마침내
다물어진 관자놀이로 온점을 찍고 나온 듯
침묵 끝에서 울음이 되고 폭죽이 되고
괄호에 묶인 말의 통로는
활주로처럼 단단한 육질의 언어가 되었다
씨앗으로 파종하여 꽃처럼 피워낸 말이
침묵의 갈피에서 가져온 문장이었던 것이다
장정희, 아가페 해변
바다의 근심이 짙어지면
백사장은 주름투성이 몰골로
시름에 잠긴다
세속의 오염과 허울 좋은 명제를
가슴팍에 걸쳐놓고
운명이라 덧씌우는 외곽의 오만함
나, 어이 할거나
무례하게 옥죄어오는 푸른 행진을
다시금 잠재우지 못해
담담히 고난의 깃발 세우는
이제 너, 어찌 할거나
나태주, 아직도
아직도 그 전화번호를 쓰고 있었다
아직도 그 번지수에 살고 있었다
봄이 온다고 해서 울컥 치미는 마음
부둥켜안고 전화를 걸었을 때
물먹은 목소리는 아직도 스무 살 서른 같은데
어느새 쉰 살 나이를 넘겼다고 했다
아직도 김지연의 바이올린
'기차는 여덟 시에 떠나네'를
들으며 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