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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순, 숨바꼭질
커튼 사이로 칼날 같은 햇살이 들어온다
세상과 통하는 길이 저랬다, 좁은 그 길을 여닫으며
칼날 같은 말과 눈빛만 오래 주고받았다
꼭꼭 커튼을 여미지만 여민 틈새로
더욱더 예리한 빛이 스며든다
칼이 들어와도 다시는 커튼을 열지 않을 거야
살을 파고드는 빛은
들숨과 날숨으로 천천히 삭이면 돼
낮은 천장에 닿은 숨 절절 녹아내리는, 여기는
아늑한 무덤
아들아, 어미의 실종을 말하지 마라
영원히 종적을 감추고 싶지만, 꼬리가 너무 길어
비어지려는 징그러운 이 긴 꼬리를
손에 둘둘 말아 쥐고, 잠시
칼날을 피해 숨어있을 뿐이니, 아들아
어미의 무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조은, 꽃과 꽃 사이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과 꽃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도드라지게 아름다운 꽃들은
그 거리가 한결 절묘하다
꽃과 꽃 사이 꿀벌이 난다
안개가 피어오른다
낙타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바람이 살얼음을 걷으며 분다
향기가 어둠의 계단을
반짝이며 뛰어 오르내린다
봉긋해지는 열매들은
서로의 거리를
앙큼하게 좁힌다
정현종, 그 사이에
순간에서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협곡이 있고
산맥이 있다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그림자들,
무거워, 한숨과도 같고
가벼워, 웃음과도 같은
그림자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그림자들
장영숙, 초대
먼 산처럼 무심하던 그가
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한다
백 년 된 아름드리 벚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황홀하다고
섬진강 숭어처럼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살다 보니 이렇게
신의 음성을 듣게 되는 날도 오는구나
한 백 년쯤 더 기다려야 올 것 같은
경이로운 시간들이
그와 나 사이에도 이렇게 오는구나
순고 앞 정류장에서 64번 버스를 타고
나는 그가 부임해온 상사 초등학교를 찾아간다
이사 천을 끼고 굽이굽이 아름다운 상사길
찻집 연우당을 지나 작은 면사무소를 지나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게 꽃 잔치가 열린 그곳
그 곳에 그가 있다
30년 먼 산보니 같던 그가
잘 익은 나무향기를 내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박영희, 단 하루라도 좋으니
단 하루라도 좋으니
형광등 끄고 잠들어봤으면
누군가와 밤이 새도록 이야기 한 번 나눠봤으면
철창에 조각난 달이 아닌 온달 한 번 보았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따뜻한 방에서 한숨 푹 자봤으면
탄불 지핀 아랫목에서 삼십 분만 누워봤으면
욕탕에 들어가 언 몸 한 번 담가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흠뻑 비에 젖어봤으면
밤길 한 번 거닐어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잠에서 깨어난 아침 누군가 곁에 있어주었으면
그리운 이의 얼굴 한 번 어루만질 수 있었으면
마루방 구석에서 기어 나오는 벌레들 그만 죽였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딸에게 전화 한 번 걸어봤으면
검열 거치지 않은 편지 한 번 써봤으면
접견 온 친구와 한 시간만 이야기 나눠봤으면
단 하루라도 좋으니
단 하루라도 좋으니
내 방문 내 손으로 열 수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