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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소, 모든 길
모든 길은
오르막이거나 내리막이다
단 한 뼘의 길도 결코 평평하지 않다는 것
늦게 배운 자전거가 가르쳐준다
춘천에서 속초를 향해 가는 길
느랏재 가락재 말고개 건니고개
오르막이면서 곧 내리막인 그 길
미시령을 넘어서니 바다다
바다, 그 또한 끝없는
오르내림의 반복
그러면서 배운다
봄이 오기까지는
모든 관계가 불편하다는 것
이성선, 거울
내겐 이제 거울이 필요 없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고
부지런히 들여다보던
거울은 필요 없다
하늘을 바라보면 그것이
나의 거울이 되었다
바닷가에 나가 높은 물결을 바라보면
그것이 나의 거울이 되었다
냇물 흐르는 시골길을 걷다가
들꽃에 얼굴을 묻으면
그것이 나의 거울이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이보다 더
매일 아이들 얼굴 속에
나의 얼굴을 묻으면
그 눈빛들이 진정한 나의 거울이 되었다
전윤호, 작은 감자
안주로 작은 감자가 나왔다
단골이라고 주인이 덤으로 준
검게 탄 자국이 있는 감자
쥐어보면 따뜻해서
선뜻 껍질을 벗길 수 없다
혼자 술 마시는 저녁
취하면 큰소리로 전화하는 사람들의
소주보다 차가운 입술이 부럽다
함부로 뚜껑을 날리며 병을 따고
죄 없는 젓가락을 떨어뜨리면
새 걸로 바꿔달라는 사람들이 두렵다
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며
내 심장은 망설이며 뛰고
비 없이 흐리기만 한 여름
가뭄 속에서
감자야 난 잘 살고 있는 걸까
강윤미, 귀신의 시
귀신이 써준 것 같은 당신의 시
요즘은 4차원의 시대니까
영감은 무슨 영감
누군가 대신 써준 걸 거야
귀신 하면 엄마가 떠올라
죽음의 순간, 그녀의 몸속에
들어갔던 할아버지
어린 나는 할아버지라고 해야 할지
엄마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그냥 귀신이라고 생각했었지
어쩜 얼굴 없는 아이가 될 수도 있다고 상상했었지
본 적 없는 표정이지만
어떤 때엔 나도 귀신이 된 것 같아
컴퓨터 앞에서 귀신이 되는 꿈을 꾸거든
내가 변신로봇도 아니고
아이와 씨름하다 갑자기 시인이 될 수는 없잖아
누구나 잠이 들면 반쯤은 귀신이 되니깐
귀신이 시를 써준다면 좋겠어
그래 준다면, 밥상에 기꺼이
숟가락 하나 더 올려놓겠어
새로 산 접시에 시 한 편 올릴 거야
내 이름과 똑같은 어여쁜 귀신 불러다
옆구리에 차고 잠을 잘 거야
이승주, 발바닥
지금도 가끔 발바닥이 시리다
발바닥은 내가 걸어온 길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배는 배고픔의 기억이 가물거려도
발바닥은
내가 걸어온 길마다 백열등을 켠다
마른 대추 같은 주정뱅이 애비가
소주병처럼 쓰러져 나뒹굴던 방구석
외풍이 드센 바람벽과
세간 나부랑이에 붙어 어른거리며 자라던 낡은 그늘
등짝에 얼음장을 지던 방바닥에 누워
밤마다 살아있는 그것이 까닭 없이 거저 서러워
뼛속까지 얼어붙던 날들을
지금도 발바닥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네 발바닥이 무척 그리웠다
너와 발바닥을 마주대고 싶었다
늘 발바닥이 시렸으므로
시린 너의 발바닥을 타고
시리고 시린 너의 가슴에 닿고 싶었다
내 발바닥이 걸어온 길과
네 발바닥이 걸어온 길이 서로 만나
우리가 걸어온 시린 길이 그냥 따뜻해지고 싶었다
우리가 걸어온 시린 길을 함께 사랑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