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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내게 사랑이 있다면
아득히 멀리 휘어진 길 같은 것이라고
띠풀 사이 논둑길 지나
장끼 소리 흘러내리는 솔숲 아래
시리게 피어 겨운 쑥부쟁이 꽃 같은 것이라고
또랑을 건너면 집이 나오고 집은 외딴 집 허물어져 가는
논일을 마치고 오는 노인 부부가
부끄러이 등 뒤에서 손을 맞잡고
도란거리며 새립으로 들어서는
적막한 오후 같은 것이라고
이수익, 들끓는 고요
짝짓기하는 큰넓적송장벌레 한 쌍이
들켰다
온갖 꽃이며 풀들 만화방창 피어나는 숲 속
도도한 녹음의 물살 한가운데서도 흔들림 없이
폭염이 날려보내는 불의 화살에도 끄덕없이
오로지 사랑에, 사랑에만 몰입한 나머지
누가 옆에서 보는지도 모르고
봐도 그냥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황홀한 열애의 구덩이에 빠져 있는
저 끝없이 단순하고 후안무치한 것들 탓으로
고요 속엔
불온한 뜨거움이 끓고 있다
송찬호, 염소
저렇게 나비와 벌을 들이받고
공중을 치받고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쩍 않고 버티기만 하는
저 꽃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하여, 우리는 저 고집 센 꽃으로부터
뿔을 뽑아내기 위해
근육을 덜어내기 위해
짐승을 쫓아내기 위해
부단히 채찍질을 하였다
그리고 부지런히 말과 글을 배운
염소 학교 졸업식 날
그에게 많은 축복이 있었다
산과 들판은 절벽에 붙어살며
바위 사이를 뛰어다니는 쿠션 좋은 침대를
시간은 쉼 없이 풀을 씹어
향을 피워 올리는 검은 향로를
시냇물은 약간 소심한 낯짝의 거울을
구름은 근사한 수염을
그리고 우리는 고삐를 주었다
김성대, 여름의 자세
여름, 물속에서 안고 있던 자세를 어느 날, 기억해 냈다
여름, 물속에서 안고 있던 자세로 잠이 들었다
모래알이 물결에 씻기는 여름
잠 속으로 떠내려 온 모래알
따뜻한 물결 위를 떠다녔다
발이 닿지 않았지만
많은 여름은 놓아두고
잠깐 동안의 자세가 여름으로 떠오르는지
하나의 해바라기를 위해 모두가 푸른
여름
오래전 빛 속에서
물결 가득한 빛 속에서
잠시 그가 되는 일
모래는 하나의 여름을 향하여 흐르고
그 여름의 나는 오늘을 이해한다
신지혜, 절
엎드려 절해보니 알겠다
낮게 엎드려 내 이마에 흙 묻혀보니 알겠다
먹이 한 덩이 찾아 기어다니는 미물들
한 뼘 땅을 밀고 당기며 지구 굴리는 것들
나를 떠받친 대지가
이리 많은 것들 한 품에 끌어안고 키우며 출렁였다는 걸
엎드려 절해보니 알겠다
들풀의 마음을, 꽃의 마음을, 나무의 마음을
흙이 목숨의 뿌리 잡아주지 않았다면
이것들 척추 세우고 포효하듯 움터 올랐을까
내가 대지보다 더 마음 낮게 엎드려보니 알겠다
지구의 무량 겁 은혜
눈뜨면 당연하다는 듯 여겼던 이 지구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불가청 데시벨 굉음소리
그도 얼마나 애써 숨 몰아쉬고 있었다는 걸
엎드려 절해보니 알겠다
더 낮게 낮게 나를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래야 저 캄캄한 구심(球心)아래
지구 한 알 공손히 받들고 있는 허공의 큰 얼굴 보리니